낯선 땅, 단풍국과 친해지길 바라.
1. 도착, 낯선 긴 비행과 마중 나온 새로운 인연
캐나다 토론토에 도착하니 현지 시각 오후 9시가 가까이 되어 가고 있었다. 빨간 단풍이 그려진 국기가 이곳저곳에 보였다.
‘아! 단풍국 캐나다에 정말 도착을 했구나!‘
10시간 넘는, 서양으로의 장거리 비행은 엄마도 나도 난생처음이었다. 와! 정말이지 엉덩이가 그렇게 아파본 적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엉덩이가 의자에 눌려 감각도 없는 것 같았다. 모양이 사각형으로 변한 것 같기도 하고, 허리도 너무 아팠다.
고된 비행을 마치고 출구로 나가자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었다.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동네 친구의 사촌 동생이었다. 글로 설명해도 참 먼 사이이다.
2. 어떻게 이 먼 인연이 캐나다에서 이어졌을까?
어떻게 이 분과 인연이 닿았는지 설명하자면, 원래는 엄마와 엄마의 친구, 그 딸과 내가 함께 캐나다로 떠날 계획이었다. 5년 전에 엄마 친구의 사촌 동생 가족은 토론토에 이민 가셔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계셨다.
영어권 나라 중에서 캐나다로 가기로 한 이유는
첫 번째로 미성년자가 학생 비자로 유학을 오면 그 아이의 보호자는 가디언 비자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는 엄마 친구분 친척이 캐나다에 계셔서였다.
3. 고된 유학 준비의 과정 그리고 이별
아빠는 제약 회사에 다니신 직장인이셨는데 처음에는 나의 유학을 반대하셨다. 그렇지만 엄마가 나의 유학을 지원하시고 싶다는 의지, 그리고 내가 유학을 가고자 하는 의지가 확고한 것을 쓴 편지를 읽으시고는 마음을 바꾸셨다.
우리 모녀의 캐나다 살이에 아빠의 지원금과 엄마의 퇴직금을 보태서 살기로 했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노후 자금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나는 이 양분을 잘 먹고 무럭무럭 성장하여 꼭 성공하기로 결심했다.
유학원을 통해서 토론토 공립 고등학교 교육청과 연결하여 다닐 학교를 고르고 학생 비자 신청을 준비했다. 출생 기록, 백신과 건강 검진을 비롯한 의료 기록부터, 학교 기록, 부모의 재정 기록, 그 외에도 많은 서류가 필요했다. 함께 서류를 준비하던 중에 엄마 친구가 딸이 유학 가기를 싫어해서 안 되겠다며 포기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엄마와 나만 떠나게 되었다.
나는 유학 가는 것이 결정되자마자, 수능 공부는 집어치우고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수능 공부는 안 해도 된다니 너무 신나는 일이었다! 나는 CNN 뉴스를 들으면서 영어 공부를 했다. 영어 공부는 늘 싫지 않고 재밌었는데 캐나다에서 써먹을 일이 더 많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니 설레었다.
그리고 혹시 학교에서 악기를 연주할 줄 알아야 도움이 될까 싶어서 플루트를 배우러 다녔다. 또 공부만 하느라 통통했던 나는 살도 빼야겠다고 결심했다. 한의원에 다니면서 식욕이 억제되는 한약도 먹고 운동도 하면서 살을 뺐다. 그렇게 바쁘게 유학 준비를 한 지 6개월 후, 다니던 고등학교에 퇴학서를 제출하고 친구들, 가족들과도 이별을 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나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언제 다시 볼 지 모르는 아빠와 오빠가 벌써부터 그리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힘들면 언제든 한국으로 돌아와도 돼. “
아빠가 울먹이며 나에게 말하셨다. 그날, 공항에서 우리 온 가족은 전장에 나가는 가족을 배웅하듯이 슬프게 울었다. 마음이 먹먹했다.
4. 그렇게 토론토에서의 새로운 출발
토론토행 비행기 안에서 엄마는 유학에 가고 싶었지만 포기했던 엄마의 꿈을 얘기해 주셨다. 그리고 한국에서 워킹맘으로 사는 것이 많이 힘들었는데, 엄마 딸은 그런 삶을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나의 유학이 엄마에게는 본인이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대리 만족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해서 출구로 나오자, 마중 나온 여러 인종의 사람들 사이에 서 있던 한 한국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분들은 우리를 금방 알아보셨나 보다.
“안녕하세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어요. “
처음 보는 분들인데 해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니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영어만 몇 시간을 듣다가 한국말이 들리니 ‘와! 나 이제 살았구나 ‘ 하는 안도와 함께 ‘혹시 우리는 지금 한국에 다시 온 것인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이미 아저씨가 내가 다닐 학교 근처에 아파트를 계약해 주셔서 지낼 곳이 마련되었어서 우리 모녀는 도착한 첫날부터 그 집에서 돗자리를 깔고 잤다. 감사하게도 아저씨가 틈틈이 우리 아파트까지 와주셔서 인터넷과 핸드폰 연결, 가구, 식기, 생필품, 식료품 등 골고루 도움을 주셨다. 그분들의 도움과 친절 덕분에 토론토에서의 정착이 수월했다.
그 시대에는 스마트폰이나 보이스톡이 없는 시대였어서 인터넷이 연결되자마자 인터넷 전화로 한국 가족들에게 안부를 묻고 전했다. 지금처럼 사진을 쉽게 공유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해외에서 소통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에 인터넷 전화는 우리 가족에게 고마운 매개체였다.
자, 이로써 다 준비되었다. 과연 우리 모녀가 이곳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사실 나만 잘하면 되는 모녀의 유학 생활이 이렇게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