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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케데헌] 루미가 원한 건 '자기수용'이 아니라

상처받은 자에게 구원자 역할을 맡기는 서사의 잔인함

by 이안류


<KPOP 데몬 헌터스Demon Hunters>(이후 케데헌 표기)의 주인공인 루미Rumi는 헌터의 핏줄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헌터로 길러졌다. 데몬이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혼문을 완성하는 것은 헌터들의 사명이다. 하지만 헌트릭스Huntr/x의 다른 멤버들에 비해 루미가 유독 혼문을 완성하는데 조급한 이유는, 루미는 데몬인 아버지와 헌터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나 몸에 데몬의 문양을 가졌기 때문이다. 데몬의 문양을 가진 헌터는 존재하면 안 되기에 루미는 이를 평생을 숨기며 살아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려서부터 루미를 돌본 셀린은 루미에게 문양을 절대로 다른 멤버들에게 보여주면 안 된다고 가르쳤고, 혼문이 완성되면 문양도 사라질 것이라 천명했다. 그래서 루미는 어릴 적부터 “We are hunters, voices strong. Slaying demons with our song.”라는 노래를 반복적으로 암송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욕망을 내재화해 왔다.



혼문을 완성해야 한다는 사명과 몸에 새겨진 데몬의 문양을 감추어야 한다는 규칙은 루미가 스스로 만든 욕망이 아니었다. 심리학자 로저스Rogers는 이를 ‘가치의 조건화(conditions of worth)’라고 불렀다. 로저스는 인간은 어린 시절 부모와 같은 중요한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받기 위해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거나 느끼도록 조건화된다고 말했다. ‘이번 시험에서 1등 하면, 엄마가 네가 원하는 거 해줄게.’, ‘아빠 말 안 들으면, 아빠는 00을 미워할 거야.’ 이렇게 조건이 가정된 사랑의 표현을 지속적으로 들으며 성장을 하면,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인정을 받기 위해 부모의 가치를 그대로 자신의 욕망이라 인식하며 이를 만족시키기 위해 살아간다. 진짜 ‘나’가 아닌 조건화된 ‘가짜 자아’는 부모의 조건에 맞는 모습으로 살아가며 자기가 진정 원하는 것을 부정하여 자기 개념을 왜곡하고 혼란을 경험한다. 그래서 로저스는 부모나 중요한 타인의 무조건적인 긍정적 존중(unconditional positive regard)을 강조하며, 조건 없이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경험의 반복을 통해서 외부에서 조건화된 가치 대신 자기의 가치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루미는 셀린에 의해 철저히 조건화되어 키워졌다. 루미에게 내면화된 조건은 ‘혼문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문양을 숨기는 것’으로, 이 조건을 지키는 한 셀린은 루미를 좋은 아이로 인정하여 사랑을 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조건을 어기면 어떻게 될까? 혼문이 완성되지 못하고, 사람들이 루미의 문양을 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가치의 조건화’의 함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으니, 나는 사랑받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사고로 귀결된다. 그래서 영화에서도 진우의 배신과 귀마의 계략으로 루미의 데몬 문양이 드러나고 혼문이 무너져 내리자, 루미는 셀린을 찾아가 자신은 맹세를 지키지 못했으니 자신을 처리해 달라고 셀린에게 말한다. 즉, 혼문을 완성시키지도, 문양을 숨기지도 못했으니, 자신은 사랑받을 가치도, 살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필자는 이 장면에서 루미를 보며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누구보다 혼문의 완성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루미였기에,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자 자신을 탓하며 처절한 모습으로 절망하고 있었다. 조건화는 상대에게는 ‘네가 그렇게 하지 못했잖아’라고 외부 귀인할 빌미를 제공하고, 스스로에게는 ‘내가 결국 해내지 못했으니까’라고 자책하며 내부 귀인하는 사고 과정으로 자신을 철저히 파멸시킨다.



넷플릭스 KPOP 데몬 헌터스Demon Hunters 루미의 문양을 가리는 셀린



루미가 셀린에게 자신을 끝내달라고 말한 이후의 대화를 살펴보자.


셀린 : 그럴 수 없어. 네 엄마가 떠났을 때, 난 네 엄마가 남긴 모든 걸 지키겠다고 맹세했어. 하지만 그게 너 같은 아이일 줄은 생각 못했지. 내가 배운 것들을 돌이켜보면 넌 분명 잘못된 존재였어. 하지만 난 약속한 게 있었지. 그래서 널 받아들이고 도와주려고 최선을 다했어.


루미: 받아들였다구요? 가리라면서요? 숨기라면서요?


셀린: 그래, 모든 걸 바로잡을 때까지! 아직 기회가 있어. 이건 가리고 다시 모든 걸 되돌려 놓자. 내가 미라와 조이에게 다 거짓말이었다고 할게. 귀마가 환각으로 우리를 갈라놓으려 했다고.


루미: 싫어요. 더는 안 숨어요. 거짓말도 안 해요!


셀린: 루미, 아직 바로잡을 수 있어.


루미: 모르겠어요? 이게 제 본질이에요. 저를 보세요. 왜 저를 못 보세요? 저를 사랑할 수는 없었나요?


셀린: 사랑해!


루미: 제 전부를요!



셀린은 계속 루미, ‘너’가 ‘잘못된 존재’라고 말하며 자신은 받아들이려 노력했다고 항변한다. 셀린이 친부모는 아니지만, 루미에게는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다. 우리는 부모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고 싶다. 그 ‘사랑’ 안에 나의 장점도 부족한 점도 ‘부모니까’ 예쁘게 봐주고 수용해 주는 마음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처참히 망가진 루미에게 셀린은 또다시 조건을 내세우며, 다시 바로잡으면 된다고 하며 루미의 문양을 옷으로 가린다. 순간 루미는 자신이 셀린에게 가장 받고 싶었던 온전한 사랑이 끝내 주어지지 않을 것임을 깨닫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전부를 사랑할 수는 없었냐고 절규한다.



넷플릭스 KPOP 데몬 헌터스Demon Hunters 의 귀마와 싸우는 루미



케데헌을 보며, 사람들은 결점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자신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사랑해야 한다고 영화의 주제를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영화의 메시지를 물어보는 질문에 루미역의 성우를 맡은 배우 아덴 조Arden Cho 또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받아들이는 '자기수용'이라고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루미가 셀린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한 채 처절하게 홀로 일어나 “what it sounds like” 노래를 부르며 귀마를 무찌르고 혼문을 재건할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불편했다. 다문화적인 키워드가 강한 미국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수용받는 ‘자기수용’이라는 메시지는 현시점에 매우 시의적절하다. 하지만 필자는 상담자로서 내담자인 루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결말은 상처받은 자에게 구원자 역할을 맡기는 서사의 잔인함이다. 처절하게 수백만 조각으로 부서진 주인공이 열악한 상황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홀로 분연히 일어나 자신을 세우고 세상의 구원자가 되는 강요된 정신승리의 불편한 서사다. 루미는 그저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싶은 아이다. 헌터의 자손이라는 특별한 출생과 감동을 주는 목소리라는 엄청난 능력을 떠나, 그저 아이돌 연령대의 여자 아이다. 루미는 셀린에게 자기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내가 어떤 모습을 가져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달라는 것이다. 내가 데몬 문양이 있든 없든 그저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것이다.



넷플릭스 KPOP 데몬 헌터스Demon Hunters 의 혼문을 재건한 헌트릭스



루미는 자신의 노래로 헌트릭스 멤버들을 깨우고 이들과 신뢰를 회복하며 다시금 따뜻한 우정과 사랑을 얻지만, 이는 대리적 보상에 가깝다. 본래 사랑을 받고 싶었던 대상인 셀린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은 다른 관계에서 메워지지 않고 빈틈을 남긴다. 물론, 멤버들과 매니저, 팬들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빈틈의 크기가 작아지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실제 상담 장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부모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싶은 핵심 신념이 깊은 내담자가 상담에서 이를 깨닫고 상담 관계를 통해 그 욕구를 부분적으로 채울 수 있지만, 그 원래 자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 때로는 타인인 상담자도 이렇게 자신을 인정해 주고 관심을 가져주는데, 왜 나를 낳아준 부모님은 내가 상담받는 것을 알면서도 변화가 없느냐며 실망하기도 한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순간이다.



아이는 결국 사랑받고, 사랑할 때 가장 인간답고 행복한 사람으로 성장한다. 그 사랑에 자꾸만 단서가 붙는다면 이는 '사랑'이라는 말로 합리화하며 타인을 조종하는 것이다. 혹시 내가 요즘 사랑하는 아이에게 "네가 00 하면,"이라는 조건절을 붙이고 있다면, 그 꼬리표를 떼어버리고 온전한 사랑을 주자. 낳아준 부모가 아니면 누구도 줄 수 없는 무조건적인 온전한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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