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를 위한 기준 체크리스트
한동안 대인관계 문제로 고생을 하다 보니 내 유튜브 알고리즘은 심리 관련 영상들로 가득하다. 관련 영상과 댓글들을 속에서 '나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는 나르시시즘을 축약한 요즘 표현이었다. 나르시시즘은 그리스 신화의 나르키소스라는 청년으로부터 유래되었다. 그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하여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렇게 자신에게 빠져서 집착하는 태도를 나르시시즘이라 말한다. 발음도 어려운 나르시시즘이라는 용어가 '나르'라는 간편한 말로 대체되어 유튜브에 관련 영상이 넘쳐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의 생활 곳곳에 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심리학적으로 나르시시즘은 자신의 불안정을 보상하기 위해 자기중심적인 관계 패턴을 보이는 것으로 정의된다. 겉으로는 자신감 있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이 허약하고 자존감이 낮아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끊임없이 외부에서 칭찬과 존중, 인정을 받아야 안정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상대를 독립적인 존재로 보지 못하고 자신을 인정해 주는 도구로만 다루게 되며, 이로 인해 대인관계에서 문제를 일으키지만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원인을 외부에 돌린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러한 나르시시즘, 즉 '나르'를 잘난 척하고 자기중심적이며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한다. 이는 심리학이 개념의 원인에 집중한다면, 일반인들은 그들이 보이는 태도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보면, 필자도 그동안 몇몇의 인상적인 '나르'들을 만나왔다. 처음에는 이들의 사교적이고 밝은 모습 때문에, 대문자 I인 필자는 그들의 에너지가 신기하면서도 버겁고 부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관계가 지속되면서 이들이 보이는 태도에 놀라고 어이없고 화가 나서 결국 거리를 두거나 관계를 끝냈었다. 어떤 '나르'들은 초반 몇 번의 만남에서 확연히 자기 존재를 팽창하며 중심에 서고 자신의 뜻대로 하려는 태도를 보여서 빨리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지만, 관계 초반에는 잘 드러나지 않다가 사적으로 친해지면서 급격히 자신의 본모습이 드러나는 '나르'들은 커다란 심리적 데미지를 남겼다.
대인관계 패턴은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기 때문에 나르시시즘이라는 한 면만 보고 판단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대가 정말 '나르'이든 아니든 모든 관계에서 이 부분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관계는 늘 말하지만 상호적이다. 그래서 대인관계 기준의 한 축은 '상호성'이며, 또 다른 축은 '존재의 인정'이다.
상호성이란 말 그대로 내가 있고 네가 있는 것이다. 즉, 내가 상대 이야기를 듣는 만큼 상대도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하고, 내가 힘들 때 공감과 지지를 받는 만큼 나도 상대에게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즘적인 관계 패턴은 상대를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한 대상으로 본다. 그래서 상호성이 아닌 일방성이 지배한다. 이들은 대단히 사교적으로 보일지라도 상대를 자신을 인정을 받기 위한 도구로 대하기 때문에 동등한 관계라는 것이 성립되기 어렵다.
또 다른 축인 '존재의 인정'은 타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태도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들은 타인을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도구로 보기 때문에, 조건부로만 관계를 맺는다. 나에게 도움이 될 때, 나를 칭찬해 줄 때, 내 편이 되어줄 때 등과 같은 조건이 붙는 관계만을 이어오기 때문에, 그 이외 상대의 경험과 가치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상대가 관계에서 불편감을 호소하면, 이를 무시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며 그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는 패턴이 반복된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상대는 점차 자신의 경험이나 감정이 사라지는 경험을, 즉 나라는 존재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사교성이 높은 사람들을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다 보니 '상호성'과 '존재의 인정'이라는 관계의 기본을 놓치고 있다. 사교성이 곧 관계능력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사교성은 '남과 사귀기를 좋아하거나 쉽게 사귀는 성질(표준국어대사전)'로, 스스럼없이 새로운 사람에게 다가가 친밀감을 형성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는 높은 사교성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을 증가시킬 수 있지만, 상호성을 보장해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외향적이고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알고 있다고 해서, 이 사람이 관계를 상호적으로 한다는 것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혹시 당신도 나처럼 사교성을 상호성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겉으로는 매끄러운 관계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불편하고 내가 사라지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분들을 위해 여기에 간단한 대인관계 체크리스트를 제공한다. 체크리스트를 통해 고민 중인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 관계 기준 체크리스트
설명: 이 설문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가 얼마나 상호적이고 건강한지를 점검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관계기준은 '상호성'과 '존재인정'이 최소 기준입니다. 각 문항에 대해 "예" 또는 "아니오"로 답해주세요.
� 문항 (모두 객관식, "예/아니오" 선택)
1. 나는 상대에게 관심을 주는 만큼, 나에 대한 관심도 받고 있는가?
2. 내 경험과 감정이 존중되고, 무효화되지 않는가?
3. 이 사람 앞에서 나는 불필요하게 조심하거나 숨기지 않아도 되는가?
4. 내가 거절이나 불편함을 표현했을 때, 상대는 그것을 존중하는가?
5. 대화의 주제와 흐름이 상대의 이야기만으로 채워지지 않고, 내 이야기에도 공간이 있는가?
6.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 상대는 최소한 공감이나 지지를 표현하는가?
7. 상대의 태도나 말이 상황에 따라 극단적으로 변하지 않고, 일정한 신뢰를 줄 수 있는가?
8. 이 관계가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들고, 배움이나 긍정적 변화를 자극하는가?
9.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예: 시간, 약속, 신념 등)를 상대가 존중하는가?
10. 갈등이 생겼을 때, 대화를 통해 다시 회복이 가능한가?
� 채점 결과
7개 이상 “예” → 건강한 관계
4~6개 “예” → 조정 필요
3개 이하 “예” → 거리두기 고려
대문 사진 출처: 사피엔스 스튜디오/ 나르시시스트의 4가지 특징, 심리학자들이 확실히 알려드립니다 [이그노벨상읽어드립니다 + 하이라이트] | 김경일 교수&김태훈 교수&이윤형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