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는 타인을 위한 게 아니라 나를 위한 것
올해 들어 SKT 유심 정보 유출 사건으로 가족들이 한바탕 전쟁을 치렀다. 나는 KT를 사용하고 있어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KT 가짜 기지국을 통한 소액 무단 결제 사건으로 황당함, 분노, 짜증을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몇 달 전에는 롯데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뉴스까지 있었으니, 이제 내 개인정보는 이미 공개된 정보나 다름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런 사회적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이없고 화가 나지만, 정작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뉴스로 뒤늦게 공개 사과와 배상 소식을 접해도 이미 쌓인 불신 때문에 진심 어린 사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일은 정치적, 사회적 이슈뿐만 아니라 가까운 대인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최근 북스터디 모임에서 “사과를 받고 싶은데 상대가 사과하지 않아 답답하다”는 이야기를 꺼낸 사람들이 있었다. 분명 잘못을 했으니 사과를 해야 하는데, 왜 하지 않고 시간을 끄는지 모르겠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호소했다. 또 사과를 받아야 용서를 하든 말든 할 텐데, 시간이 계속 흘러 답답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우리는 흔히 불화가 발생하면 피해자가 사과를 받아야 비로소 용서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과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건 직후에 하거나 얼마 지나지 않아 했을 것이다. 시간이 오래 흘렀는데도 사과하지 않는다는 것은 애초에 사과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한다는 뜻일 수 있다. 결국 기다리는 사이 지쳐가는 것은 피해자다. 간절히 기다리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억울함과 분노로 바뀌고, 그 감정은 일상을 잠식한다. 그러나 정작 상대는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과를 기다리는 일은 결국 삶을 멈추게 한다.
KT 사건 같은 사회적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특정되지 않거나 당사자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쉽게 “포기”하거나 “용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관계에서는 당사자가 분명하기에 우리는 더 절실히 사과를 받고 싶어 한다. 나 또한 살아오면서 사과를 간절히 기다린 적이 몇 번 있었고, 직접 행동으로 옮겨 사과를 요구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3전 3패였다.
사과를 받으려 직접 나서게 될 정도라면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뜻이다. 그만큼 간절한 상황에서 사과를 받지 못했을 때의 충격은 더 크다. 사과받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렇지 못할 경우 온 세상이 부조리해 보인다. 그러나 사과할 사람이었다면 내가 가기 전에 이미 먼저 사과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패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었다.
나는 쓰라린 경험들을 통해 사과와 용서는 별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또한 사과를 받고 용서해야 관계가 조정되거나 마무리된다고 믿어왔다. 그렇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우리는 사과 없는 세상에서도 살아가야 한다. 억울함과 분노를 계속 붙들고 사과받는 데 에너지를 쏟다 보면 정작 현재를 살아갈 힘조차 남지 않는다. 그래서 나를 위해서는 사과가 없어도 용서를 선택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용서를 가해자의 잘못을 덮어주거나 죄를 사해주는 행위로 오해한다. 그래서 “내가 왜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느냐”는 반발도 생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용서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용서는 가해자의 잘못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는 그 사건이 내 삶 전체를 규정하지 않도록, 내가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선택이다. 그는 여전히 잘못했을 수 있고, 여전히 사과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 사건에 매여 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용서다.
결국 용서는 타인을 위한 면죄부가 아니다. 용서는 내 삶을 지키는 또 하나의 언어다. 사과 없는 사회에서, 끝내 오지 않는 사과를 기다리며 분노에 붙들려 살기보다 “나는 이 사건에 더 이상 묶여 있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시간을 되찾고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