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_The Ghost in My Mind #7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잘 지낸다고 생각했다. 내가 불편감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관계는 지속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이 점점 복잡했다. 내가 X를 좋아해서 힘들었고, X도 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더욱 고통스러웠다. 서로의 다름이 점점 기지개를 켜며 그 차이를 알아봐 달라고 아우성을 쳤지만, 우리는 비겁하게 농담조로 진심을 툭툭 던지며 서로의 눈치를 봤다. 둘만의 테이블이 다리를 절며 자꾸만 삐그덕 소리를 냈지만, 우리는 그 소음을 듣지 못한 척, 불편하지 않은 척했다.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보내는 시간은 더욱 많아졌지만, 대화는 궁금하지 않은 말들로 겉돌았고 소재는 빈약해졌고 침묵은 길어져 시간을 삼켰다. 하지만 우리의 바다는 여전히 평온한 듯 보였다.
뜨거운 계절풍을 먼저 타고 있던 X는 여러 사업을 진행하고 사무실을 계약하며 매우 분주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계속된 학업으로 인해 시간적인 제한이 많아 생업에 투자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박사 수료 후 시간적 여유가 생기자 예전부터 같이 일해보자고 졸랐던 X의 제안을 또다시 받아들이게 되었다.
박사 코스 워크를 마치자 오랜 긴장감에 억눌려왔던 나의 현실적 불안이 또다시 고개를 들었고, X는 이런 나의 스케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지속적인 X의 제안을 내가 계속 고사해 왔던 이유는, 더 이상 학원 업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미 겪을 만큼 겪었고 내 젊은 시절의 에너지와 야망이 산화(散華)된 곳이기에 미련이 없었다. 하지만 시원섭섭한 박사 수료 후 학교에 출석하지 않아도 된다는 후련함은 며칠 가지 않았고, 텅 빈 시공간은 나에게 불안감을 점차 자아냈다. 여전히 그 냄새를 X는 너무도 잘 공략했고, 나는 현실적 불안에 승복했다. ‘어차피 이틀은 학교 갔었으니까 그 시간에 학원 다니며 돈 벌면 되지.’라고 합리화했고, ‘뭐, 예전에 했던 일이니까 쉽게 일하면서 여유 있게 논문 준비하자.’라고 스스로를 다잡았었다. 그렇게 나는 X와 일주일에 이틀은 같은 학원에서 각각 강사로 일했고, X가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한 부분에 참여하기로 된 상태였다.
“언니, 나 이번에 계약하는 사무실에 책상을 이걸로 살까 하는데 어때?”
“담당자가 빨리 계획서를 보내달라는데 이 정도 써서 보내면 되겠지?”
“혹시 이번 일에 더 좋은 아이디어 없어, 언니?”
몇 개월 동안 X는 일적인 이야기와 사적인 의견을 두서없이 내게 쏟아냈다. 학원이라는 공간과 X의 사업에 참여하는 프로젝트 때문에 처음에 나는 오히려 대화가 원활하게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우리의 대화는 학원과 X의 일과 관련된 주제로 도배되기 시작했다. 특히 X는 사무실을 이제 막 차린 직후라 사무실을 유지해 가며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불안감에 모든 관심사가 사업에 집중되어 있었고 잘해야 한다는 마음이 컸다. 학원이야 둘 다 고용된 입장이니 상관없으나 사업은 X의 꿈과 미래였다.
그래서 X는 학원에서 나를 만나면 자신의 사업이나 새로운 사무실을 차리면서 겪는 다사다난한 생각과 감정을 나에게 토해 냈다. 계약이 성사되거나 담당자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으면 칭찬과 응원을 해주었고, 일에 차질이 생기거나 업무 스트레스가 커지면 위로와 지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그저 강사로서 일하러 학원에 출근했지만, 그곳에서 나는 X의 친구이자, 동료 강사이자, X에게 고용된 직원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더욱이 X보다 한 살이 더 많았기 때문에 나는 ‘언니’로서, 또한 ‘학교 선배’로서 보듬어 주고 조언도 해주는 존재여야 했다. 불쑥 X가 말을 걸면, 나는 친구, 동료, 직원, 언니, 선배 중 어떠한 얼굴을 해야 할지 판단해야 했다.
어느덧 항상 긴장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곳이 학원인지, 스타벅스인지, 사무실인지 헷갈렸고, 내가 친구인지, 언니인지, 동료인지, 직원인지 정체성에 혼란이 왔다. 그 시기에 내가 가장 자주 만나는 사람이 X였기 때문에, 나는 지금 X가 꺼낸 대화 주제가 학원에 관한 것인지, 프로젝트에 관한 것인지, 가족에 대한 것인지, 사업에 대한 것인지 들어보고 판단하고 이에 맞게 반응하느라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X는 자신 삶의 거의 총체를 나에게 보고하고 내 생각을 물어봤다. 더욱이 함께 하는 일이 많아질수록 일뿐만 아니라 X가 토해내는 기쁨과 짜증, 불안에 이중, 삼중으로 응답을 해주는 감정 노동의 치어리더 역할을 하다 보니, X와 함께 퇴근하는 길이 업무의 연속처럼 느껴졌다. 끝없이 쏟아지는 발화의 연속적인 파도에 휩쓸려 나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무너지는 경계는 나를 지치게 했고 불편감이 아우성을 쳤지만, 나는 차마 들여다보기 무서워 자꾸만 마음의 심연으로 흘려보냈다.
X 또한 전보다 내 눈치를 보는 것 같았고, 전보다 시큰둥한 내 반응에 불편함을 감지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는 언어화도 행동화도 되지 못했다. 함께 퇴근하는 차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은 X의 얼굴에 여러 겹의 잿빛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리는 둘 다 예전 같지 않음을 미묘한 공기로 느꼈지만, 마치 나만의 착각인 것처럼, 성공하면 모든 게 나아질 거라 믿는 스타트업 창업자들처럼, 애써 보지 않으려 했다. 우리의 대화는 점점 피상적인 단어들만 떠다닐 뿐 연결되지도 공명하지도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