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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끈끈함 vs. 밀도

부제_The Ghost in My Mind #6

by 이안류

X는 어세스타 강사 경험을 기반으로 석사 졸업 후 사업을 시작하고 점점 더 기세를 올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나는 7년 넘게 이어진 학업과 자격증 시험, 논문, 생업의 연쇄 고리에 빠져 내 한계치를 경험하고 있었기 때문에, X의 사업 이야기는 먼 나라 소식처럼 들렸다. 다른 세상이었다. X는 앞으로의 노후를 위해 더 늙기 전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강박이 유독 커서 사업을 시작하며 닥치는 대로 일거리를 맡았고 가능성이 보이는 자격증을 만들어 노후 연금처럼 마련하고자 했다. 이러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X는 그 사안을 나에게 가져왔고 나는 내일로 바쁜 와중에 그 이야기를 듣고 때로는 조언을, 때로는 응원을, 때로는 아이디어를 줘야 했다. 끝이 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아까웠다. 뭔가 자꾸 내가 아이디어를 주는데 결국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막막하다고 해서 이래저래 머리를 굴려 생각나는 아이디어를 주면 X는 고맙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지만, 결국 '수강생들 반응이 좋았다'는 강의 후기에 나는 또다시 '잘했다', '수고했다' 응원을 해주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X가 너무도 당연하게 내 아이디어를 요구할 때, 나는 멈칫했다.




“나도 모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강의하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난 뒤로 물러섰다. 더 이상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서운했다. 어쩌면 나는 ‘언니가 준 아이디어가 강의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었어. 고마워.’라는 말을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말을 이제야 요구하는 것이 치졸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내가 뒤로 물러선다고 X가 물러나지는 않았다. X는 적극적이고 모험적이고 도전적인 사람이지만, 반대로 저돌적이고 공격적이고 무모하기도 했다. 너무도 좋았던 기억이 많았고 X의 상처와 고민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버거웠고 불편했다. 감정의 저울이 출렁거렸고 자꾸만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더 다잡았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무(無)로 만들고 싶지 않아서, X는 좋은 아이고, 지금은 X의 말대로 바빠서, 사업이 자리가 잡히지 않아서 그런 거라고 더 단단히 내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X와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면, 우리는 본래 이렇게 서로를 위하는 좋은 관계니까 내가 느낀 불편함은 그때 그 순간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관계는 급속도로 멀어진다. 특히 삶이 흔들리고 불안정한 시기에 만난 사람일수록, 그 불안의 무게를 함께 버텨냈다는 이유로 정서적인 끈끈함이 빠르게 생긴다. 마치 위기를 함께 통과한 동지처럼 말하지 않아도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누군가에게는 평생 친구가 될 것만 같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의 경험 속에서 그 끈끈함이 곧 ‘관계의 밀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8263283-XZVAMFFF-7.jpg Kseniia TihhonovaTorrevieja, Spain https://www.saatchiart.com/kseniiatihhonova



끈끈함은 감정의 급류 속에서 생겨나는 접착제와 같다. 서로의 두려움, 상처, 실망, 외로움, 열망에 공명하면서 빠르게 가까워지고, 몇 번의 강렬한 경험으로 급격히 연대감이 형성된다. 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그 순간의 감정에 기반한 결속이지, 상대에 대한 깊은 이해나 신뢰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니다.




반면 밀도는 다르다. 그것은 시간이 걸린다. 같이 웃고, 때로는 싸우고, 한동안 연락이 없다가 다시금 일상의 틈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과정 속에서 천천히 만들어진다. 그래서 회사에서 야근하며 힘든 시기를 함께한 동료들과는 동료애와 같이 강한 끈끈함은 느낄 수 있어도, 퇴사하고 몇 달이 지나면 그 유대는 쉽게 흐려진다. 그 관계에 밀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는 X와의 관계가 밀도 있는 관계라고 혼자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삶의 비슷한 고비를 지나며 나눈 대화들이 진심처럼 느껴졌고,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는 관계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우리는 서로의 삶의 방식이나 가치를 깊이 이해하기보다는 정서적인 친밀감만을 반복했다. '잘할 수 있다'고 '고생했다'고 다독이고 응원해 주기에 바빴다. ‘친밀감’이라는 함정에 빠져 서로 잘 안다고 생각했고, 친밀하니까 함께 일하면 좋을 것이라 기대했다. 이렇게 서로를 잘 알고 친밀하니 밀도 있는 관계가 되었으리라 예단해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밀도를 만들고 있는 과정이었고, 끈끈함이라는 접착제는 서로를 경험할수록 농도가 짙어지는 것이 아니라 흐려져만 갔다. 관계의 밀도는 기간으로만 만들어지지 않으며, 감정으로만 쌓이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밀도 높은 관계’라는 말이 이상향일 수 있다. 그래도 나는 X와 나눈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가능성을 보았고,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많은 삶의 대화를 공유한 친구를 그저 ‘시절 인연’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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