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_The Ghost in My Mind #9
오래된 친구 M을 만났다. 대학 신입생 오티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내 인생의 60퍼센트의 구간에 존재하며 험난했던 젊음을 함께 살아내온 친구이고, 서로 가장 믿을 수 있는 나의 반쪽이다. 가장 힘들 때 달려와 주었고, 삶의 돛대가 흔들릴 때마다 서로 다투며 울고불고했지만, 서로의 깊은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 이야기를 네가 아니면 누구한테 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곤 한다. 인생에서 힘든 이야기도,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까봐 차마 말 못 하는 생각이나 의견도 우리 안에서는 가능했다. 그래서 그런가. 친구 M이 보고 싶었다.
친구 M의 학교 근처에서 오랜만에 만나 잠봉이 듬뿍 들어간 담백하면서도 짭짤한 파니니 샌드위치로 간단히 저녁을 먹으며 서로의 근황 소식을 나눴다. 교수로 재직 중인 M은 요즘 수업과 학과장 일로 일폭탄을 맞아 정신이 없다며 왜 이러고 사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도 늘 그렇듯 내 근황을 꼼꼼히 물어보며 챙겼다. 다시 간 학원 생활은 어떤지, 연구는 어떻게 되어 가는지, 강아지들은 잘 지내는지 등 당연한 듯 나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며 업데이트했다. 문득, M의 질문에 대답을 하며 이런 대화가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바빠서 두세 달에 한 번 정도 만나고 있지만, 그리고 보니 한동안 내 삶의 영역에 대해 궁금해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카페로 옮겨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친구 M은 나의 표정과 대화 속에서 뭔가 겉돌며 회피하고 있는 불편감을 감지했다. 우리는 오래 알고 지내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통하는 부분도 많았고 묘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특히, 친구 M은 흔히 말하는 '촉'이 좋은 친구였다. 그런데 막상 이야기를 꺼내려니 할 게 없었다. 그저 다 소소했다. 내가 X와 크게 싸운 것도 아니었고 멱살 잡이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점점 힘들었고 불편했다. 나는 그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M은 이미 다 알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학원에 가지 말랬잖아. 그거 아니어도 충분히 방법이 있을 거라고. 네가 그때 좀 조급해 보이긴 했었어. 너무 힘들면 그만둬.”
나는 X가 제안한 학원을 가기로 선택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친구 M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를 했었다. 나의 가족은 가지 말라고 했고, 내 깊은 마음속의 나 또한 이건 아니라고 말렸다. 하지만 나는 이미 말한 것처럼 현실적인 고민에 마음이 불안해진 상황이라 갈팡질팡했고, 마지막으로 M의 의견을 구했었다. 그리고 M도 역시 반대했다. 이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나는 학원을 선택했고, 지금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학원에서 얘들 시험 기간 끝나고 나면, 아무 생각이 없어져.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기도 해. 이틀만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험 기간에는 아무래도 출근을 더 하게 되니까, 생각보다 시간을 너무 많이 뺏기더라고. 작은 학원이라 학생들 학년이 제각각이고, 지금 초등 4학년부터 고1까지 가르치니까 시험대비를 하면서도 초등 수업이 살아있는거지. 내가 주로 크고 시스템이 갖춰진 학원에서 일했어서 그런지 여긴 너무 갖춰진 게 없고 일단 운영해야 하니까 학생을 다 받는데... 수업도 많으니 정신없는 거지. 게다가 원장님이 학원을 처음 해보셔서 뭘 해야 할지 모르시고, 학생수가 적으니 나도 뭔가를 요구하기에 눈치 보이는 거야. 그리고 그 친구 하고도 일하는 방식이 좀 안 맞기도 하고. 그런데 시간은 가고. 내가 뭐 하고 있나 싶고... 뭘 해야 될지 모르겠어.”
나는 정리되지 않은 X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요즘 내가 느끼는 나의 상황과 느낌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 만에 다른 사람에서 해 본 건가. 내 답답함을, 내 혼란을, 물어보는 사람이 없어, 나눌 사람이 없어, 나는 내 안에 가둔 채 자문자답의 쳇바퀴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뭘 해야 되긴 논문 써야지. 박사 수료 했으면 당연히 논문 쓰는 게 일이지. 마음 복잡할수록 논문 써. 괜스레 잘 쓰고 싶다, 멋지게 쓰고 생각하지 말고 일단 써. 빨리 쓴 논문이 좋은 논문이라고 했잖아. 논문 써.”
M의 대답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약간 머리를 한 대 팅 하고 맞는 느낌이었다. 너무 당연한 소리인데 잊고 있던 터라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학원에 와서 X와 일하고, X의 사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몇 달 사이 나는 애초의 내 계획을 다 잊어버렸다. 이틀만 일하니까 나머지 시간은 내 일을 하고 연구와 논문을 쓰면 된다고, X도 나를 설득했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수용한 것인데 아니었다. 학원에 온 지 4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는 온통 X의 일에 휩싸여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래서 친구 M을 만나고 집에 오는 길, 지하철 유리창에 흐릿하게 비치는 나의 표정은 생각의 무게에 짓눌려 눈빛이 공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