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단편집1 05화

[시리즈] 사계, 여름

이 푸르름 속에서

by 류설의


지난가을, 캐나다에서 부모님께 네 소식을 전해 들었어. 너에게 남자친구가 생긴 것 같다며 이전과 달리 외출을 자주 하고 가끔씩 방 문 너머로 들려오는 전화소리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부모님께서 정말 기쁘다고 말씀하셨어. 그동안 네가 누군가에게 마음을 여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어떤 사람일지 몹시 궁금해지더라. 혹시라도 네게 부담이 갈까 지금껏 모르는 척하고 있었어. 조만간 한국에 들어갈 예정인데 그때가 되면 내게 자세한 이야기들을 해줄래? 그동안 네게 주려고 모아둔 캐나다 마그네틱, 엽서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들을 잔뜩 준비해 놨거든. 이야기에 대한 대가라고 할까? 그리고 곧 있으면 네 생일이잖아. 캐나다에 있는 동안에도 매년 이맘쯤 여름만 되면 네 생각이 많이 났어. 그동안 한국에 들어가지 못해서 미안해. 이번 너의 생일 때엔 반드시 한국에 갈 예정이야. 3주 정도는 머무를 예정인데 요즘 한국에서는 어디가 핫하니? 같이 많이 놀러 가자. 아, 그리고 부모님께는 내가 한국에 들어간다는 소식은 비밀로 해줘. 깜짝 놀라게 해드리고 싶거든! 두 분 다 엄청 놀라시겠지? 그럼 한국에서 보자. 혹시라도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게 있다면 미리 메일로 알려줘. 사랑해, 내 동생.




더운 건 알았지만 이토록 더울 줄이야.

몇 년 만에 느껴보는 한국의 무더위, 난 네가 몹시도 그리웠어.


인천공항을 나서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무거운 공기에 놀라 어깨에 두르고 있던 얇은 카디건을 서둘러 벗고는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셔댔다. 내가 타려는 공항버스가 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20분 남짓. 노래 몇 곡을 듣고 나니 버스가 도착하여 짐을 넣고 서둘러 자리에 앉아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땀을 식혔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잠을 자면서 오느라 피곤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내가 캐나다로 떠났던 이유들에 대해 회상하기 시작했다.


23살에 떠났던 캐나다 어학연수의 추억을 잊지 못한 나는 유학까지 떠나기로 결심했고, 29살의 겨울부터 시작한 그 생활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가족들이 1년에 한 번씩 이곳으로 놀러 오곤 했지만 나는 그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한국에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렇게 총 6년의 시간을 지금까지 캐나다에서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지내왔다. 졸업 후 간호 국시를 치른 뒤 이곳에 오기 직전까지 몇 년 동안의 병원 생활을 병행하면서 상당히 많은 시간들을 영어 공부에 투자하였음에도 이곳에서의 생활은 녹록지 않은 부분들이 많았다. 역시나 가장 걸리는 점은 언어. 하고 싶은 말들을 마음처럼 표현하지 못해 꽤나 애를 먹었으며 언어 이외의 음식이라던가 향수병과 같은 다양한 부분에서 불편함들이 생겨났는데 그런 점들을 몇 년 동안 충분히 심사숙고했기에 버틸만했다. 또한 이곳에 오래 남아있을 만큼 내게는 안성맞춤이었던 점들도 많았기에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굳건히 먹고 지냈다.


확실히 한국보다 워라밸이 보장되는 환경들이 주는 이점들은 내게 자유 그 자체를 선물해 줬다. 이전 직장 생활에 비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고 지금의 생활에 대체적으로 만족하며 지내고 있다. 그러나 역시 한국의 속도는 너무나도 그립다. 전 날 밤에 시켜놓은 택배가 아침에 도착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캐나다에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행정 속도는 말도 못 한다. 성격 급한 내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자유로 덕분이었다.


가장 서러운 점은 영원히 나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점이다.


다행히 내가 캐나다에 온 뒤부터 조금씩 K-열풍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대도시의 경우 길을 걷다 보면 케이팝이 흘러나오는 일이 일상이다. 그로 인해 한국 제품을 찾는 것이 쉬워졌고, 맛있는 한식당이 많아져 꽤나 이득을 보고 있다. 특히 우리 병원의 많은 캐나디안 환자들이 내게 BTS와 블랙핑크의 노래 가사들을 읊고, 오징어게임에 대한 감상평을 전한다. 많은 이들에게 인사말과 감사말 정도 알려주었는데 퇴원할 때 나를 보며 90도 인사를 하고, 감사합니다라고 또박또박 말하기까지 해서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근 30년을 자랑스러운 나의 나라, 한국에서 살아보았고 이제 남은 생은 내가 살아보고 싶은 나라들에서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여행하듯 살아가보고 싶어 이곳에 오게 되었는데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느끼며 살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픈 이들을 도와가며 자유롭게, 그리고 나답게 이 삶을 사랑하고 또 사랑할 것이다.




알람을 맞춰놓지 않았다면 그만 종점까지 갈 뻔했다. 나도 모르게 잠에 들었나 보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집은 낯선 듯 여전한 모습으로 존재했다. 부모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며 내 방의 물건들을 천천히 둘러봤는데 떠나기 전과 그대로였다. 내가 한국에 언제 올지도 모르시면서 먼지 하나 없을 정도인 걸 보니 옛 추억에 잠시 잠겨 금방이고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릴 적부터 아빠는 매 주말마다 다 같이 대청소를 하자며 아침부터 모두를 깨우시곤 했었는데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히 그려져 울 것 같던 내 얼굴이 금세 웃음을 지어냈다. 포근한 침대에 잠시 누워보니 은은한 섬유유연제 향이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아마도 이건 동생이 내가 온다는 메일을 받고 나서 전 날 세탁을 해둔 것이겠지.


내가 삶을 기억하는 순간부터 아빠는 일요일 아침이 되면 다 같이 대청소를 하자며 아침 8시부터 엄마와 나를 깨우시곤 했다. 청소를 하려면 배 속부터 든든해야 한다며 간단한 아침을 챙겨주셨다. 졸린 눈을 비비며 김에 싼 밥과 함께 볶음김치와 스크램블 같은 것들을 엄마가 입에 넣어줄 때를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주말이면 다들 늦잠도 자고 싶을 텐데 누구 하나 싫어하는 기색 한 번 내지 않았던 이유는 온 가족이 대청소를 끝내고 난 뒤 모두 고생 많았다며 아빠가 만들어준 스페셜 점심 식단을 모두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요리에 그다지 소질이 없으셨지만 다행히 우리에겐 슈퍼맨 같은 아빠가 있었다. 아빠의 요리들은 우리들을 매끼마다 행복하게 만들어주셨는데 특히 위에서 말했던 대청소날 점심 메뉴는 평소보다 특별했다.


우선, 말일쯤 되면 우리 세 식구는 뽑기를 진행했다. 이 뽑기는 다음 달의 매주 있을 대청소날의 점심 메뉴를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우리 가족들끼리 하는 특별한 놀이였다.


매달 최소 4번의 주가 있으니 공평하게 각자 1주씩 가지고, 남은 한 주는 뽑기를 통해 승자를 가렸다. 그리고 주가 5번이나 있는 달은 뽑기 며칠 전부터 모두 은근한 기대를 가지며 누가 2주를 가져갈지 혹은 3주를 가져가기도 할지에 대한 소소한 내기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각자 1주 차를 맡을지 2주 차를 맡을지에 대한 것까지 정하고 나면 끝이었다. 주말이 되기 며칠 전에 아빠에게 원하는 음식을 미리 알려주면 대청소날 주말 점심시간에 아빠는 우리들에게 그 음식들을 만들어주었고, 그것을 먹으며 우리만의 작은 파티를 열었다.


매주 우리에겐 새로운 음식에 대한 작은 미식회가 열렸다. 각자의 의견을 주고받으며, 때론 날카로운 평론가가 되기도 했다. 그때마다 아빠는 그 모든 의견들을 정리하고 추합 하여 다음번 동일한 음식을 만드실 때 그 의견들을 최대한 수용하여 맛을 개선해 나가셨다.


각자의 입맛 취향에 대해 말해보자면 아빠는 한식, 엄마는 일식 위주였으며 나는 그야말로 음식을 탐방하는 모험가 그 자체였다. 정말이지 아주 폭넓은 음식 취향을 갖고 있었는데 그게 어떤 음식이든 아빠는 항상 '그거 만들어보기 정말 재밌겠는걸?' 하며 매번 재밌어하시고 맛있게 만들어주셨다. 밥 대신 아이스크림을 만들어먹자고 하더라도 '우리 딸, 괜찮은 아이디어야! 어떤 맛을 원하니? 그렇지만 엄마와 아빠는 아이스크림으로 배가 차진 않을 것 같은데 밥을 조금 챙겨 먹고 후식으로 먹어도 될까?'라고 상냥하게 내게 말씀해주시곤 했다. 이전까지 베이킹 한 번 해본 적 없으셨지만 내가 먹고 싶어 하던 피자빵이나 케이크와 같은 것들을 열심히 검색하여 완성도 높게 모두 만들어주셨다. 물론 종종 실패하시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우리들은 즐거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요구사항이 참 많기도 많았다. 손님이었으면 진작에 블랙리스트로 낙인찍히고 남았을 거야.


우리들은 각자의 입맛에 맞는 요리든 아니든 최선을 다해 서로의 취향을 존중해 주었고 그 시간들을 정말 소중히 여기며 함께 보냈다. 매주 함께 우리들의 공간을 깨끗하게 만드는 노동과 그 뒤에 찾아오는 꿀맛 같은 휴식과 함께 아빠의 정성이 듬뿍 담긴 맛있는 음식들을 나눠먹는 시간이야말로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그렇게 우리만의 세계 속에 결말을 모른 채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아갔다.


그런 행복한 유년시절이 가득한 한국을 떠나 가족들과 떨어진 머나먼 캐나다로 왜 떠났는지에 대해 내게 묻는다면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른이 되어 살던 둥지를 떠나 새로운 둥지를 스스로 찾고 만들어가는 그런 자연스러운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저녁 시간이 돼 가니 부모님과 동생이 집에 왔고, 희둥그레진 네 개의 눈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정말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어 결국 터져버렸고, 끊이지 않는 웃음에 나중엔 배가 엄청나게 당기기도 했다. 그런 우리들을 바라보며 동생은 은은한 미소로 나를 반겨주었다. 엄마는 동생에게 '넌 알고 있었냐며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며 먹을게 별로 없는데'라고 하시며 반가움과 미안함의 얼굴을 하고 계셨다.


나는 온전히 우리끼리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에 외식 대신 다 같이 집에서 간단히 저녁을 차려먹기로 했다. 나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렇다 할 메뉴는 없었지만 집에 있는 재료들로 아빠는 녹슬지 않은 요리 실력을 뽐내주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꽁치김치찌개를 해주셨는데 간을 한 번 봐달라는 말씀에 한 입 먹어보고는 눈물이 왈칵 쏟아다. 가장 그리웠던 우리 집 밥 냄새. 아빠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셨다. 지난 6년간 매년 한 번씩 가족들이 캐나다에 놀러 와 얼굴을 보곤 했지만 그동안 떨어져 산 시간들이 확실히 체감된 순간이었다.


너무나도 그립고 그리웠던 고향의 맛, 따뜻하고 든든한 가족들의 품. 잊고 있던 수많은 기억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이런 내 감정을 들키기 싫어 고춧가루 때문에 눈이 매웠던 거라며 새하얀 거짓말을 하고는 정말 맛있다며 엄지를 들고는 잠시 화장실로 도망갔다.


다 같이 저녁을 챙겨 먹고, 캐나다에서 사 온 선물들을 모두에게 나눠준 뒤 일찍 잠을 청했다. 3주간의 한국에서의 시간이 벌써부터 아쉽게 느껴진다.


시차적응만큼은 제발 짧게 끝나길. 내겐 지금 한시가 아까우니까.




동생과 나는 어릴 때부터 정반대였다.


나는 뜨거운 여름에 동생은 차가운 겨울에 태어났다. 그리고 우리들은 마치 계절과도 같은 성격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여름처럼 열정적이고 밝고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나는 어릴 때부터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아 반장을 거쳐 전교회장, 대학 시절엔 과대도 도맡아 했었다. 그것도 모자라 동아리 회장과 어학연수를 다녀온 뒤 직접 영어 동호회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 나와 달리 동생은 아주 조용했고, 친구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학원에서 이따금 마주칠 때마다 혼자서만 조용히 책 한 권을 읽고 있는 모습들만 보곤 했다. 가끔씩 선생님들께서 나와 내 동생이 자매라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시며 내게 '너희는 서로 닮은 구석이 없어 정말 신기하다'며 말씀해주시곤 했다.


그때마다 어렸던 내게는 무언가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맙소사, 우리가 피 하나 섞이지 않았다는 게 남들 눈에 보이는 건가?'라고 생각하며 가슴이 콩닥콩닥해지곤 했다. 다행히 내가 말하지 않는 한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었지만.


고등학생 때까지 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재혼가정인걸 몰랐으면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그게 부끄러웠던 건지 친엄마의 자리를 새엄마에게 온전히 내어주기를 부정하는 마음이었는지 아마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남들과 다르다는 게 그때의 내게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다. 친엄마가 아닌 새엄마를 나의 엄마로 온전히 받아들이는 데까지 내게는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그건 새엄마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싶다. 아빠와 새엄마는 서로 사랑하여 가족이 되었지만 새엄마께서도 친딸이 아닌 나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기에 시간이 필요했을 테니까. 다행히 새엄마는 친엄마처럼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마음을 열기 어렵지 않았다. 새엄마와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었지만 우리 네 사람 모두 조금의 벽을 서로 느꼈지만 그런대로 잘 지냈고 행복했다. 조금은 엄마를 잊어감에 미안할 정도로.


나의 친엄마는 간암에 걸려 내가 11살 때 돌아가셨다. 이제는 20년도 더 된 어릴 적 일이라 그런지 엄마의 기억들이 또렷하게 기억나진 않는다. 점점 흐릿해져 가는 기억들을 붙잡고 원망도 많이 했다. 그중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엄마가 내게 했던 유언이다.


사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기억은 불공평한 일 아닌가 생각하곤 했었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에서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나를 보며 부모님께서 흐뭇하게 웃어 보이신다던 지와 같은 행복한 기억이 마지막이면 참 좋았을 텐데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말라지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죽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다니. 힘겹게 숨을 뱉어가는 엄마의 마지막 모습들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무섭고 떠올리기 아리고 슬픈 기억이었다. 고작 11살이었던 내게 엄마는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꺼져가는 생명력을 붙잡고는 내게 단 한 가지 부탁을 하셨다.


부디 살아가며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품으라고.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세상을 떠나셨다고 한다.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건지 아니면 엄마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과 함께 그때의 유언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까지 살아가는 것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보다 많은 것들을 사랑해 보려 어릴 적부터 발버둥 쳐왔던 기분이다. 고등학생 때는 3년 내내 주말마다 봉사활동을 다녔다. 대학을 가기 위해 일정 시간 필수 봉사 시간들이 필요하긴 했지만 할당량을 채운 뒤에도 나는 내내 봉사를 다녔다. 고3 바쁜 수험 생활을 쪼개가면서까지도 봉사활동을 하러 갔다. 반장, 부반장과 학생회장을 도맡으며 모범이 되려고 노력했다. 겉도는 친구들을 보면 매번 챙기려 노력했고 지속적으로 말을 걸기도 하고 때론 간식을 나눠주고, 프린트물을 챙겨주며 귀찮게 굴기도 했다. 지금도 그 친구들과 연락하며 지내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그 친구들은 내게 그 귀찮음이 사실은 자신들에게 정말 필요했던 귀찮음이었고, 그 시절에 간절하게 누군가 자신에게 따스한 관심을 베풀어주길 바랐다고 했다. 그때 베풀어준 관심이 참 고마웠다고. 다만 모두에게 통하는 건 아니니 주의할 것.


나는 엄마의 유언의 의미를 알고 싶어 행동한 것일까 나라는 사람이 원래 그런 사람인 것일까.

결과적으로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품으라는 엄마의 유언대로 직업마저 간호사가 되었다.

나이팅게일의 후예, 이 얼마나 충실한 딸인가.


언제든 어디서든 엄마는 나를 지켜볼 것만 같았다. 실망시킬 수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 말을 나는 알아야겠다.


이쯤이면 충분히 유언 수행을 잘하고 있지 않나 싶은데 내게 한 가지 미묘한 실패라고나 할까.

그런 사람이 내 주변에 한 명 있는데 여전히 내겐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사실 그 사람은 바로 내 동생이다. 동생과의 첫 만남은 엄마가 죽기 세 달 전이었다. 그때의 내 동생이 어린이병동에 입원해 있던 시점이었는데 병원에서 엄마와 놀다 심심할 때면 나를 이뻐해 주던 간호사선생님을 따라 간식을 받아먹으러가 곤했었다. 그러려면 어린이병동을 지나야 했다. 분명 다른 길도 있는데 간호사선생님은 꼭 어린이병동을 지나가는 길로만 나를 데리고 가주셨다. 엄마가 병원에 오래 있을 거란 걸 알고 계셔 내게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 한 아이가 눈에 띄었다.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활짝 열린 병실 문 안으로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던 아이가 한 명 있었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내 동생이었다. 가끔씩 병원 탐방을 해보겠다며 종종 그곳을 혼자 찾아가곤 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말을 하고, 돌아다니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등 표정이나 행동들이 보였는데 그 아이만 아무 말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병실에서 때론 누워서, 때론 앉아서 밖만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한 달을 넘지 궁금해하다 결국 말을 걸어보았는데 아이는 나를 가만히 쳐다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찾아갔지만 여전히 그대로였다. 간식을 줘봐도, 이쁜 인형을 들고 가서 자랑을 해봐도 그림 그리자고 해봐도 다 소용없었다. 나중에 간호사님께서 내게 '저 친구는 지금 너무 슬퍼서 말을 할 수가 없거든. 너무 속상해하지 마. 분명 저 아이도 너를 마음에 들어 할 거야.'라고 해주셨다.


그때의 동생은 말 그대로 슬픔에 빠져 '실어증'에 걸린 상태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얼마나 슬프면 말을 잃기까지 할까 마음이 아프다. 지금도 말수가 적고 조용한데 원래 그런 아이인 걸까 아니면 저때를 기점으로 달라진 것일까 내심 물어보고 싶었지만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새엄마께서 말씀해 주시길 타고나길 친아빠의 성향과 비슷하다고 했다. 그분은 글을 쓰는 작가였다고 하셨다. 글을 쓸 때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을 적어내셨지만 평소에는 굉장히 과묵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아마 동생이 그 성격을 그대로 닮은 것이 아닐까 우리는 생각했다.


어릴 적 나는 동생이 가진 슬픔에 대해서 어렴풋 들었었다. 아빠는 엄마를 간암으로 잃었고, 새엄마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었다고 했다. 그때 함께 차에 타고 있던 동생을 최대한 자신의 몸으로 감싸 안아 동생은 다행히 가벼운 타박상 외 다친 곳이 없었다고 했다. 대신 마음이 크게 다쳐버린 것이다. 시골에 있는 친가를 가던 중에 났던 사고였다는데 사람 하나 지나다니지 않는 구불길에 안개가 짙게 깔려서인지 그날따라 구급대가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었다고. 동생은 잠시 동안 기절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뒤 피투성이였던 친아빠 품 속에서 꽉 안겨 그대로 20분을 넘게 방치돼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과다출혈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일로 인한 충격으로 동생은 꼬박 2년간 말을 잃었다고 했다.


새엄마는 나와 같은 직업인 간호사셨다. 사고가 있던 날 나이트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사고 전화를 받고 그대로 복도에서 주저앉으셨다고 했다. 새엄마와 이런 깊은 이야기까지 하게 된 건 내가 간호학과를 들어간 뒤부터 함께 이야기할 주제들이 많아져서였다. 그전까지도 좋은 관계로 지냈지만 서로 깊은 얘기를 하기에는 내가 아직 어리기도 했고 마음의 벽을 부수기까지 꽤나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특히 간호사 생활을 하고부터는 그야말로 절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엄청나게 가까워졌다.


그리고 동생에 대한 걱정들로 우리 둘 다 꽤나 오랜 시간 속으로 앓던 각자의 고민이 있었는데 꺼진 생명력을 억지로 붙잡는 살아가는 모습이랄까. 정확히 말하면 우리 눈에는 '우울증' 환자 증상과 겹쳐 보여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엄마께서는 동생의 친부가 오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씀해 주셨다. 몇 번이고 죽으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러다 본인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다행히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그 잔해들이 이따금씩 감기처럼 찾아오곤 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동생이 태어나고부터는 그런 모습들이 완전히 사라져 정말이지 새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고 했다. 그분에게는 동생이 자신을 오랜 어둠 속에서 구원해 준 존재였을 것이다. 사고 속에서 동생을 지켜내려 자신의 몸을 방패로 삼아 끝내 지켜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다행히 동생은 새엄마의 보살핌 속에 천천히 실어증이 나아졌는데 완전히 사라지기까지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고, 나아진 뒤에도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고 했다. 나중에 동생에게 내가 들었던 엄마의 유언에 대해 말했을 때, 동생도 내게 자신도 사고 속에서 아빠에게 들은 마지막 말이 있다고 말해줬다.


'아빠가. 아빠가. 우리 딸. 무조건 지켜줄게..'


우리 모두 상실을 경험했다.

그리고 그 점이 우리들을 연대하게 했다.




내가 15살이었을 때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다. 경미한 교통사고였지만 혹시 몰라 응급실을 찾았던 아버지께서는 담당 간호사였던 지금의 어머니와 사랑에 빠지셨고, 그 해 겨울, 바로 결혼을 하셨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동생을 보고 너무나도 기뻤다.


처음 그 아이를 마주하고 4년이 지난 그날, 동생이 말하는 기적을 보고 생각했다.

그래, 살다 보면 분명 회복할 수 있어. 상처도, 아픔도. 괴로운 기억들도.


나는 지금의 새엄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내게 무척 많은 사랑을 주려 노력하셨고, 친엄마가 생각날 만큼 다정하시고 사랑스러우신 분이시니까. 처음으로 다 같이 만난 자리에서 내게 한 번 안아봐도 되겠냐고 하시며 살포시 안아주셨는데 나는 그때 새엄마에게서 어렴풋 친엄마의 냄새를 맡았다. 아주 그립고도 오래된, 그 냄새를 잊은 줄 알았는데 단번에 알아챘다.


잊지 않고 있었어. 단 한순간도 말야.

나는 언제든 어디서든 엄마를 찾아낼 수 있었다. 정말이지 내겐 엄마가 필요했다.


무채색을 좋아하고, 빈틈없는 성격에 말수는 적지만 재미를 아는 녀석인 내 동생을 정말이지 사랑한다. 먹는 재미를 모르고 사는 건 참 유별나다고 생각하지만 그 점까지도 사랑한다.


이제는 엄마의 유언의 의미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잘 알겠다.

엄마는 내게 최고의 말을 해주시고 떠난 것이다.


최고의 선물을 주고 떠나 줘서 고마워.

정말 열심히 살 테니까, 지켜봐 줘요.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는 그날에,

당신의 마지막 말을 지키며 살았다고 말할게요. 사랑해요.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의 순서대로 하나의 옴니버스 형식의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에게 '여름'이란 청춘과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인데요. 뜨겁기에 열정적이고, 뜨겁기에 자칫하면 데일 수도 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런 열정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보고 싶었습니다.


인물이 주는 에너지를 실제 인물에 빗대어 표현을 하면 좀 더 상상하기 좋더라고요. 그래서 이번 글은 언젠가 이 [사계] 시리즈가 단편 영화로 나오길 바라며 제가 상상하는 이번 '여름' 이야기의 주인공과 에너지가 맞는 분을 떠올리며 적어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열정을 가지고 사시나요?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의 이야기가 존재하듯 여러분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그럼 여러분 모두의 소망이 이뤄지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글은 [단편집1 - 류설의]의 여섯 번째 단편글이었습니다. ※

※ 이 글은 [단편집1]에서 사계를 주제로 담은 4가지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작성한 두 번째 단편글이기도 합니다. 남은 가을, 겨울의 이야기 또한 기대해 주세요. ※

▶ 다른 시리즈 보기 → https://brunch.co.kr/@ryuseol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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