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의 시간들
내가 그를 처음 알게 된 계절은 3월의 봄이었다. 1년간의 휴학을 끝내고 듣는 첫 교양 수업 오랜만의 등교라 긴장된 탓에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어느 순간 잠이 들었고, 알람 소리에 놀라 깼을 때는 수업 시작까지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다. 부랴부랴 준비해 나가서 다행히 지각은 면했지만, 아슬아슬하게 학교에 도착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구석 자리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남은 자리 또한 얼마 없어 보였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인기 많은 강의 top3 중 하나라는 이 인문학 강의는 이번 학기에도 역시 정원이 꽉 차서 자리를 좀 더 늘려달라는 성화가 있었다고 들었다. 운 좋게도 복학하자마자 이번 강의를 듣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교수님이 들어오시기 전 눈에 보이는 아무 빈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마침 바로 사선 자리에 그가 앉아있었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고 있던 차 교수님께서 들어오셨고 앞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른 지 얼마 안 된 것 같이 단정하고 차분해 보이는 검정 생머리, 톤다운된 청색 체크 남방은 적당히 하얗고 고운 그의 피부색과 잘 어울려 보였다. 살며시 보이는 옆모습으로는 그가 착용하고 있는 검정 뿔테 안경이 그를 더 신비롭게 만들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일순간 그의 모든 것이 궁금해졌다.
개강한 첫날이니 교수님께서는 복잡한 것들은 차차 알아가고 오늘은 앞으로의 전반적인 강의 계획에 대한 짧은 안내만 해주겠다며 앞으로의 한 학기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빠르게 강의를 끝마치셨다. 나는 그 짧은 시간 속에서도 교수님 말씀에 집중은커녕 이미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져 마치 나만 다른 세상 속에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온 신경은 오직 그에게로 쏠려있었다.
용기가 없었던 나는 가방을 챙겨 강의실에서 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잠시 멍하니 있다 나 또한 강의실에서 나왔다. 다음 강의까지 시간이 꽤나 많이 남아있어 도서관으로 향하게 되었다. 복학하기 전에도 나는 거의 매일을 도서관에서만 살았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이 없었기에 매번 혼자 강의를 듣고, 혼자 밥을 먹고, 강의가 끝나거나 시간이 남을 때마다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가끔 다가와준 동기들과도 간단한 스몰토크를 하긴 했지만 그 이상의 가까움은 없었다. 평소 술을 좋아하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었으며 대화를 하더라도 관심사가 아니라면 먼저 어떤 주제를 꺼내 대화를 유도하지도 않았기에 학기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어있었다.
다행히 외로웠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시간 속에서는 외롭지 않았기에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나는 도서관으로 향하여 책을 빌리고 읽고 또 읽었다. 휴게실에서도 운동장에서도 어디든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나만의 작은 도서관이 되었다.
분명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혼자 생활하는 나의 대학 생활이 재미없고 따분해 보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유일하게 이 학교에서 마음을 열고 친해진 사람이 한 명 있는데 바로 도서관 사서 언니다. 처음 그 언니와 대화를 하게 된 계기는 내가 대여하려던 책이 기계에서 셀프 대여가 되지 않아 문의드렸는데 알고 보니 그 도서가 분실 도서였다며 한동안 내내 찾아다녔는데 끝내 찾지 못해 포기하고 있었다고 이렇게 찾아줘서 고맙다며 내게 교내 카페 기프티콘을 건네주시며 시작되었다. 그렇게 도서관에 갈 때마다 가끔씩 대화를 하게 되었고 시간이 맞을 때는 같이 학식을 먹고, 커피도 사 마시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며 교내를 산책하곤 했다.
보통이라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일이 불편했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언니에게서는 그런 감정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이 같달까.
사서 언니는 자신의 직업을 정말이지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작가들의 책들을 전부 줄줄이 꿰고 있었고 언니 또한 내 나이 때 책과 지독히도 깊이 사랑에 빠져 결국에는 도서관 사서가 되기로 결심했었다고 한다. 그렇게 한평생을 책과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눈에 보이는 책들을 시간이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었다고 한다. 읽다 보니 점점 욕심이 나 자신의 글을 써보고 싶었고 바쁘게 생활하면서도 틈날 때마다 소소하게 글을 써왔는데 몇 년 전에는 우연한 기회에 작은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띄어 출간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전업 작가가 될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평생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를 달성하여 너무나 깊은 행복을 느꼈었다며 그때의 일을 마치 어제의 일처럼 회상하며 반짝 일렁이는 언니의 눈빛이 내게는 한순간 온 우주의 역사를 두 홍채에 모두 담아낸 것만 같은 충만함으로 아름다워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이 내게 너무나도 강렬히 남아 그 해 내내 나의 온 마음을 뒤흔들어놨다. 그리고 나는 그다음 해에 휴학을 하게 되었다.
평생을 사람보다 책을 가까이해 왔던 나의 아주 깊은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나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보고 싶다는 열망 속에서 언제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해 왔었는데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부터 결국 그 고민은 확신이 되어 굳어져버렸고 이내 모든 걸 다 던져버리고 그것만을 바라볼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나의 욕망은 해방되어 버렸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소망하는 것 중 하나인 작가가 되고 출간을 해보는 것. 나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정말이지 지난 1년 동안은 두 가지 일만 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오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남은 하루 동안은 책만 읽고, 글을 썼다. 그 생활만 했다. 아주 단순하고 매일이 같은 하루였다. 그리고 나는 그 단순하고 반복되는 삶 속에서 진짜 행복을 느꼈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나고 나서 나는 다시 나의 현실 마주하게 되었다. 처음 부모님을 설득할 때, 딱 1년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면서 시간을 보내보겠다고 선언한 뒤 부모님은 한 번도 내게 간섭하지 않으셨다. 약속된 시간 이상을 할애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님께서는 내게 무어라 하시지 않으시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처음 했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그다음 해에 다시 복학 신청을 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시험기간이 아닌 금요일 오후의 도서관은 텅 빈 것처럼 조용하기에 마치 내가 이곳을 대관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유독 이 시간을 더 좋아해서 별 일이 없는 한 매주 이곳을 찾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공부를 하고 집에 갔다. 이 날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창가 쪽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고 한 시간 남짓 책을 읽다 잠시 고개를 들었는데 다시 지금, 내 눈앞에 익숙한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나의 바로 앞 사선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뒷모습이 아닌 앞모습이었다.
한순간 당황스러워진 나는 책 사이로 내 얼굴을 가려버렸다. 만져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나는 얼굴이 붉어진 상태라는 것을. 침착하게 몇 번의 호흡을 가다듬은 뒤, 살며시 책 너머로 앞을 바라보았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나를 아는 듯 살짝 눈인사를 건넸다. 나 또한 잠시 머뭇거리다 눈인사를 건넸는데 이내 그의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잠깐 망설임이 분명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저기.. OOO 교수님 인문학 강의 듣고 계시죠? 강의실에서 몇 번 뵀어서 인사드렸어요."
주변을 둘러보니 다행히 근처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도 몇 번 뵀어서 기억해요.."
"다행이네요. 음.. 실례가 안 된다면 한 가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사람이 내게 궁금한 게 있다고? 말도 안 돼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괜찮으니 물어보라고 답했다.
"혹시 이번 교양 과제 다 하셨나요?"
그럼 그렇지. 이 사람이 내게 궁금한 게 있을 리가 전무하지. 이미 나는 과제가 나온 날, 도서관에 남아 과제를 끝내고 집에 갔었다. 그래서 그에게 과제는 다했다고 대답했더니 왠지 그랬을 것 같다며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혹시 그 부분에 대해 조금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고 별로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기에 알겠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그는 바로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겼고, 그가 건네준 과제를 천천히 읽어보니 이 정도 끝냈으면 남은 부분은 그다지 어려운 부분이 아니었을 텐데라는 의문이 조금 들었지만 몇 가지 도움을 주고 나니 20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는 큰 도움이 됐다며 답례로 저녁을 사겠다고 했는데 나는 이 정도로 저녁을 얻어먹기엔 너무 도움이 미미하지 않았나라는 혼잣말을 했더니 그는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는 정말로 필요했던 도움이니 괘념치 말라며 답하고 함께 학교 앞 분식집으로 향했다.
그와 함께한 짧은 저녁 시간 동안 나는 내 마음을 숨기며 그와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그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나이는 나보다 2살 많았으며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는데 다행히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며 취업도 그쪽 방향으로 할 생각이라고 했다. 내내 듣고만 있는 내 모습을 보며 그는 말수가 적은 나를 전혀 불편해하지 않았고 적당한 말들로 오디오를 채워줬다. 그리고 내가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대화 주제들을 금세 깨닫고는 그것들에 대한 더 깊은 대화들을 유도해 줬다. 사서 언니와는 다른 약간의 불편함들이 있었지만 대화를 하면서 나를 배려해 주는 그의 모습에 미묘한 설렘을 느꼈다. 적당히 배를 채운 뒤 함께 역까지 걸어갔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할 때쯤 그에게서 온 연락에 나는 짧게 답을 했고, 그 뒤로 우리들은 가끔 전화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시간이 맞을 때는 함께 학식을 먹기도 했고, 과제를 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나의 학교 생활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에게서 들은 대학 생활은 이전과 꽤나 달라진 모양이었다. 항상 농구 동아리 사람들과 시간을 보냈던 그는 틈날 때마다 나를 보러 도서관으로 와줬고, 조용히 구석 자리에서 홀로 책을 읽는 내게 캔커피나 사탕 같은 것들을 하나씩 건네주고 떠났다. 그는 나보다 2살이 많았지만 학년으론 같았기에 조금씩 취업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고 함께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더욱 가까워졌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의 연인이 되어있었다.
연인이 된 첫날, 그는 나를 처음 본 날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교양 수업에서 처음 본 것이 아니라며 복학 신청을 하기 위해 학교를 찾은 날 우연히 정문 앞에서 한 손에는 두툼한 책 한 권을 들고 단정한 긴 생머리를 흩날리며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을 보고 반했었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말을 걸지 못했다고 다음번에 만나게 되면 꼭 용기를 내서 말을 걸어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운명처럼 같은 교양 수업을 듣게 된 걸 알고 난 뒤 속으로 엄청 기뻐서 내게 말을 걸어보려 했지만 막상 그때마다 어떤 핑계를 대며 말을 걸어야 할지 모르겠어서 매번 내 뒷모습만 바라보게 되었고 몇 번은 용기를 내 나를 따라가 보았지만 그때마다 혼자 밥을 먹고, 도서관에만 가는 모습이었다고. 그리고 단 한 번도 나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분명 자신이 말을 걸고 나면 차일 것 같아 남은 한 학기 동안 함께 수업을 들을 텐데 자신 때문에 불편해질 내가 걱정되어 반쯤 포기하고 있던 찰나 조금 남은 과제를 마무리하러 도서관에 찾았는데 그날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처음, 내가 책을 읽으며 웃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은 이렇게 웃는구나' 하고 생각했고, 그 순간 나를 향한 마음을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고 느꼈다고 했다. 평생 저 미소를 곁에서 보고 싶어 거의 끝낸 과제를 핑계로 말을 걸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니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이렇게 함께 서로의 두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함께 이 마음을 나눌 수 있음에 마음속 깊은 기분 좋은 울렁임을 느끼게 됐으며 이 사랑 끝에 처음의 우리들처럼 서로의 뒷모습만을 지켜보며 애태우는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현재의 그를 그리고 지금의 우리를 보다 더 많이 눈에 담고, 마음에 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학하기 전과 다를 바 하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대학 생활이 조금은 다른 방향성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그 다른 방향성은 좀처럼 회색 빛으로 가득했던 나의 삶을 이전보다 다채롭게 만들었고, 그 다채로움이 내겐 불안했지만 그 불안정을 이젠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이란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투사하지 않고, 다른 세계를 내 안에 품는 것. 내 것을 내어주고 희생할 줄 아는 것. 계산하지 않고 바라지 않는 것. 언젠가 한 사람이라도 그 뜨거움이 식어버리면 일순간 서로의 모든 것을 상실하게 되는, 잔인할 만큼 비효율적인 것이 지금 내가 이 사람과 하는 사랑이라는 것.
그와 함께 시작된 새로운 사계의 시작이 부디 끝나지 않기를
영원히 이 서클이 반복되어 우리가 함께이길.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계절의 순서대로 하나의 옴니버스 형식의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저에게 '봄'이란 새로운 시작들에 마음이 들뜨는 것들이 잔뜩인데요. 그 시작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라면 그리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면 어떨까 하는 간지러운 마음에서 글을 써내려 봤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 누군가는 지금 사랑을 하고 계실까요?
그렇다면 그와의 시작이 어땠는지 잠시 회상하며 추억하는 시간을 가져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때의 기억과 감정들은 흐릿해지기 마련이니 가끔 꺼내보며 추억하는 시간들로 이따금 소중한 것들을 잊지 않는 시간들이 우리들에겐 필요하니까요.
그리고 지금 사랑하고 계시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어떤 사랑을 하고 싶으신가요?
바라시는 첫 만남이 있으실까요? 그런 상상들을 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시면 어떨까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이뤄지길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 글은 [단편집1 - 류설의]의 네 번째 단편글이었습니다. ※
※ 이 글은 [단편집1]에서 사계를 주제로 담은 4가지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작성한 첫 번째 단편글이기도 합니다. 남은 여름, 가을, 겨울의 이야기 또한 기대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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