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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이방인 연습//마음의 거리

10화. 삶의 속도와 분재의 역설

2025년 10월 25일 토요일 일기글에서 발췌

정년퇴직하신 선배님들과 함께 걸었던 하루는 삶의 '속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주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지만, 각자의 나이(70~80대)에 맞는 템포를 건강하게 유지하며 걷는 그 모습에서 나는 안정감을 느꼈다. 잠시 나의 속도를 잊고 그들의 노년의 속도에 발을 맞추며 깨달았다. 삶의 속도란 외부의 시계나 환경이 아닌, 오직 내 안의 건강과 때가 결정하는 고유한 나만의 삶의 리듬이다. 이 속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내면의 안정감을 선택할 수 있다.


국화 분재 전시회에서 '방향'에 대한 역설을 마주했다. 수석(壽石)에 뿌리를 내린 국화는 구부러지고 꺾인 가지들로 삶의 굴곡진 역경을 그대로 투영했다. 땅의 양분을 갈망하며 아래로 길게 뻗은 뿌리는 삶을 견뎌내려는 강렬한 욕망이었고, 단단한 수석(壽石)조차 국화의 생명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모습에서 깊은 공감을 얻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작가의 의도라는 폭력적 행동이 숨어 있었다. 주 성장 가지를 자르고 철사로 감아 나무의 자연스러운 뻗어나갈 방향을 구속한 것이다. 작가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기 위해 나무의 본성을 축소하고 감금한 모습은, 타인의 시선에 맞춰 나의 진정한 자아를 꺾고 축소했던 지난날의 나 자신과 같았다.


우리는 타인을 향한 욕심으로 상대를 구속하기도 하고, 나 자신을 향한 타인의 욕심 때문에 억지로 굽어지기도 하는, 분재가 된 나무와 같다.


선배님들의 걸음이 '있는 그대로의 속도 수용'을 가르쳤다면, 분재의 역설은 '있는 그대로의 방향 수용'을 요구한다. 진정한 삶은 외부의 철사를 풀어내고, 나의 고유한 속도와 방향대로 뿌리를 뻗어나가게 허용하는 데 있다. 타인이 정해준 모양대로 부러질 듯이 꺾이려 애쓰지 않고, 내가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갈 때 비로소 자유와 평안이 깃들 것이다.

자작시 '분재'가 생각나 옮겨 보았다.


분재



욕심,

구속,

감금,

축소.


자유 갈망,

용트림,

꿈만큼 이루지 못한 성장.


내 자아와 닮은 꼴.



[이방인 연습]
이 시는 2019년 <시> 동인 두 번째 공동시집에 수록했던 시다. 연수원 부장 시절 경기도 곤지암 인근 화담숲에서 연수를 진행할 때였다. 다양한 숲 생태를 인공으로 조성했기에 원시림의 자연스러움은 없었지만, 걷고 대화하기에 좋은 분위기로 잘 가꿔져 있었다. 하지만, 분재용 철사에 묶여 작가가 원하는 모양으로 변형된 나무, 잘리고 억지로 구부러진 가지, 그리고 다른 식물과 강제로 접목되어 원래의 모습이 변형되거나 다른 꽃을 피워내는 분재 전시는 오히려 슬퍼 보였다.

원래의 모습과 삶이 힘들어 새로운 변화를 외부의 사람들에게 맡겼을까?
분재에 희생된 나무와 식물은 자기 결정권이 무시된 삶을 어떻게 견뎌내고 있을까?

마치 지금을 살아가는 내 모습과 닮았기에 슬픈 공감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눈에는 아름다운 것이 마음마저 아름답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감정의 균열이 분재를 감상하는 내내 나를 이방인의 시선으로 머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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