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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마라톤 약속, 서울에서 꽃을 피우다

나의 마라톤 철학: 천천히, 멈추지 않고, 웃으면서, 부상 없이.

출발의 긴장감


2025년 11월 2일, 새벽 기온 4도. 서울 상암 월드컵 공원에 섰다. 쌀쌀한 공기였지만, 완주를 향한 나의 마음은 지난 10년의 다짐으로 가득 차 따스했다. ‘천천히, 멈추지 않고, 부상 없이, 그리고 웃으면서.’ 풀코스 열 번째 완주를 향한 이 굳건한 네 가지 약속을, 나는 오늘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이행하려 했다.

이 특별한 여정의 시작은 고마운 인연들 덕분이었다. 이른 아침, 나를 안전하고 신속하게 서포트해 준 친구의 헌신적인 마음은 빚이 아닌 감사의 에너지로 기억의 저장소에 담아두었다. 그리고 함께 선 교원마라톤 동호회의 최** 총무와, 첫 풀코스 도전에 나선 행동파 공** 회원. 각자의 긴장감을 장착했으나, 우리는 이미 '동료애'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대변줄'이 가져온 이변, 그리고 동료애


출발 직전, 예상치 못한 복병이 찾아왔다. 전날 과다했던 탄수화물이 독이 된 듯 배가 살살 아파왔다. 마라톤 풀코스에서 출발 전 배변 활동은 완주와 연관하여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혼잡한 화장실 앞에서 소변줄(소변을 보기 위해 서있는 줄)인지 대변줄(대변을 보기 위해 서 있는 줄)인지 헷갈리던 찰나, 동료이자 총무인 최**의 도움으로 비어있는 대변줄에 바로 설 수 있었다. 사소하지만, 대회 시작과 동시에 진한 동료애를 느끼게 해 준 이 순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대변줄의 이변' 덕분에 우리는 가장 늦게 출발하게 되었다. 이미 모든 풀코스 참가자가 떠난 후, 가장 마지막에 출발하는 우리는 수많은 박수를 받았고, 뒤따라 출발할 10km 주자들의 무서운 기세 속을 가르며 달려 나갔다. 속은 시원했지만, 뒷머리는 서늘했다. 하지만 그 박수 소리는 이미 내게 특별한 완주의 서사를 예고하는 듯했다.



30km의 일침: 철학의 재정비


출발과 동시에 약속했던 대로, 우리는 10km 지점까지 6분 30초대로 달리며 초반의 페이스를 조절했다. 20 km지점까지는 6분 15초/km의 나쁘지 않은 기록으로 순항했다. 풀코스 17,000명, 10km 17,000명, 총 34,000명의 러너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무리에 휩쓸려, 누구도 멈출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함께 달렸다. 풀코스 첫 도전자는 반드시 이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길 권장한다. 많은 러너들이 내뿜는 열기와 대회장의 분위기가 나를 멈추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30km 지점 이후, 진정한 시험대가 찾아왔다. 임플란트 치료와 치솟는 혈당 때문에 30km 이상의 장거리 연습을 거른 채 대회에 참석한 나에게, 몸은 정직하게 응답했다. 고관절과 무릎 관절에 찾아온 통증은, 연습 부족을 꾸짖는 일침이었기에 견딜 수밖에 없었다.

나는 속도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렸다. 지난 11년을 달리며 체화한 나의 마라톤 철학, 즉 '힘을 빼고 보폭을 줄여 무리하지 않는 주법'으로 회귀했다. 통증은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숙명이었기에, 참고 견뎌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며 천천히 뛰었다. 약속은 ‘완주’였지 ‘기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6분 30초/km대를 유지하려 노력했고, 이때부터 동료들과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꾸준히 앞으로 달려 나갔고 동료들은 통증으로 인한 고통이 발목을 잡아 뒤쳐지기 시작했다.



서울이라는 도시의 힘, 그리고 샤인머스캣


35km 지점을 지나며 체력은 바닥났고 통증은 더욱 심해졌다. 솔직히 이 구간부터는 서울의 멋진 풍광을 감상할 여력조차 없었다. 이 구간에서 나를 살린 것은 오직 '외부 에너지'였다. 쉼 없이 물과 이온음료를 제공하는 역대급으로 훌륭했던 보급품과, 무엇보다 서울 시민들의 응원이었다.

낯선 러너에게 에어파스를 뿌려주고, 과일과 에너지 음료를 건네며 이름까지 불러주는 젊은 혈기의 응원은, 마치 통증이 이는 근육에 직접 놓는 에너지 젤 링거와 같았다. 특히 37km 지점에서 만난 ‘샤인머스켓 세 알’의 환상적인 달콤함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에너지젤보다 힘을 불끈 솟게 한 강력한 부스터였다.

마포대교, 양화대교, 잠수교를 넘나들며 한강의 강력한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현대와 근대의 건축물이 오묘하게 조화된 서울의 풍경이 내 눈과 마음에 평안을 주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한복판의 도로를 완전히 통제한 채 뛸 수 있는 이 영광스러운 경험 자체가, 10만 원이라는 참가비가 절대 아깝지 않은 이유였다.



700m: 10년의 약속을 완성하는 순간


40km 지점에 이르자 체력은 완전히 바닥났고, 고관절과 무릎 슬개골의 통증은 극심해졌다. 그러나 '이제 겨우 2km 남았다'는 생각이 나의 달림은 멈추지 않게 했다. 카메라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고, 시민들의 응원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대회를 즐겼고 마지막 남은 기력을 짜냈다.

결승점인 올림픽공원 700m 전. 먼저 골인한 완주자들과 시민, 달림이 크루들의 응원 함성이 나를 완전히 재정비시켰다. 연신 터져 나오는 응원의 목소리, "다 왔다. 000 최고다!"라고 이름이 불리는 소리는 마치 나를 응원하는 소리로 들리며 팔다리의 기력을 회복시키는 마법과 같았다.

'부상을 당하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11년 마라톤 경험의 교훈을 되새기며, 나는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되, 천천히, 멈추지 않고, 웃으면서 멋진 포즈로 골인하자.' 나는 응원의 함성을 종아리와 허벅지 근육에 박아 넣으며 보폭을 넓혀, 부상 없이 웃음 띤 얼굴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10년 동안 나와 굳게 약속했던 모든 것을 행동으로 실천해 완성한, 감격 그 자체의 순간이었다.



에필로그: 서울, 나의 철학이 피워낸 꽃


이번 JTBC 마라톤 대회는 나에게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하는 날이었다. 2014년에 마라톤에 입문해 2015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풀코스를 뛰었다. 정상적인 대회와 코로나 기간의 버추얼 대회를 합쳐 총 10번째 풀코스 완주를 이룬 역사적인 오늘이었다.

서울은 '과거와 현대의 공존', '대한민국의 수도', '한강의 기적'이라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 선망의 도시다. 바로 이 특별한 도시에서, 나의 버킷리스트인 10년 동안 부상 없이 풀코스를 완주하는 영광스러운 의미를 한 스푼 얹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은 더 특별한 도시로 내 가슴속에 영원히 새겨질 것 같다.

고작 10번이라는 횟수가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송도에서, 춘천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차곡차곡 쌓인 이 10년의 달리기 경험은, '힘들어도 웃자, 무리하지 말자, 내 속도대로 꾸준히 멈추지 말고 가자'는 구본준이라는 사람의 삶의 철학과 세계관을 만드는 단단한 자양분이 되었다. 나와의 약속이 이루어진 이곳, 서울이라는 특별한 땅이, 그 철학이 마침내 피워낸 아름다운 꽃이 되어 내 마음에 새겨졌다.


다음 대회는 '울트라 마라톤(100km)'에 도전하며 또 다른 세계관을 장착하는 마음을 멈추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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