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여든이 넘도록 출근할 줄은 몰랐다. 어려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고단한 삶이 아니다. 이를테면, 고상한 실버 세대가 누리는 잉여분의 삶 같다고나 할까. 아직은 허리도 꼿꼿하고 눈도 맑고 머리숱도 이만하면 풍성하니 그나마 다행이다. 더욱 살기 좋은 세상이 앞으로 올지도 모르지만, 대체적으로 풍요로움의 시대에 잘 편승하여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회사는 아주 잘 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았다.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이 중간중간 과속 방지턱을 넘듯이 몇 번의 어려움은 있었다. 아마도 나의 느슨한 마음을 정비하고 일에 매진하라는 계시로 이해했다. 너무나 잔잔한 호수 같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단조롭지 않을까?
내 주변인들은 나에 대해서 두 가지를 진심으로 부러워한다. 이 나이에도 여전히 허리가 꼿꼿한 채로, 그것도 자신이 세운 회사의 명함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아직까지는 혼자 운전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해서 전담 비서를 마다하고 출근을 한다. 종종 자율주행 기능을 이용하긴 하는데, 몇 차례 오작동으로 인한 사고들도 있었고, 왠지 마음까지 자유롭지는 못했다. 이제는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발목과 다리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내가 일할 번듯한 직장이 있다는 것, 그것도 상임 고문으로서... 원래는 그냥 고문이었는데, 그것도 시간이 흐르니 앞에 '상임'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주었다. 사실 기분이 그렇지, 하는 일은 그냥저냥 똑같다. 몇 년 전 주주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위촉받은 사장은 자주 나에게 자문을 구하지만, 나에게는 '고문'이다. 그래서 내 직함이 고문인가 보다. 알아서도 잘하지만 꼭 내게 최종 재가를 받는 편이다. 이제는 상임이니 예전보다 한 단계 높은 고문을 가할 모양이다. 한마디로 달콤 살벌하다.
나 뿐만 아니라 회사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인재 확보가 참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인성과 재능을 골고루 겸비하여 오랜 기간 함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CEO라면 누구나 꿈꿔보는 이상일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채용 공고를 본 어떤 분이 우리 회사 문을 두드렸다. 다만 일반 사람과 다른 점이라면 AI 인공지능이 탑재된 사이버 휴먼 로봇이었다. 로봇이라고는 하지만, 외모는 인간의 형태와 똑같았다. 말도 그렇고 걸어 다니는 모습 등, 사람이 하는 모든 것과 차이점이 없었다. 다만, 이들 휴먼 로봇들은 사람들과 같은 주민등록증도 있었으나 번호 체계가 달랐고, 범죄를 예방하고자 몸에는 자체 바코드 시리얼 번호칩이 내장되어 있었다. 이들 로봇들은 종종 인간들과 번호 체계가 다른 것에 차별을 둔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지만, 극심한 것은 아니어서 몇 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었다. 이것도 사이버 로봇 출신 국회의원이 발의한 법안이기도 했다.
세상의 변화에도 순응을 해야 했고, 우리 회사도 처음으로 이런 친구를 채용했다.
그런데, 회사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 친구가 면접 때 보여준 태도들에 대해서 면접 때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일 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좀 더 이런 부류의 친구들을 뽑아야 할 생각이 들 정도로 긍정적인 면이 많았다.
특히, 나에게는 격의 없는 직원이었다. 내게 빈말을 잘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보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평소에 잘 느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누가 보면 아부나 아첨한다고 색안경을 쓰고 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도 처음엔 '이 친구가 나한테 왜 이러나?'하는 마음이었으니까. 그런데 자세히 보니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고 그가 상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까지도 전반적으로 잘하는 것이었다.
"김 고문님, 오늘 피곤해 보이시는데, 어디 편찮으세요?"
"이번 달 보너스를 받았는데요, 제가 조그마한 감사의 선물 하나 드릴까 합니다. 약소하지만 받아주세요. 항상 감사드립니다."
"지난 두 달간 회사 출고량이 적어서 걱정입니다.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지 저도 고민 한번 해볼게요."
"회사 바닥 공사를 다음 주 토요일에 하신다고 들었어요. 제가 그때 나와서 뭐 도와 드릴 건 없을까요?"
"이 일은 다했는데요, 다른 할 일이 있으시면 도와드릴게요."
"하늘이 참 맑습니다. 기분이 절로 좋아지네요."
내 머릿속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내 마음을 잘 읽었다. 내가 듣고 싶은 말만을 골라서 했다. 자신의 감정도 잘 표현했다. 참으로 따뜻한 직원이었다. 진짜 인간들보다도 따뜻한 마음을 지닌 존재였다. 어찌 그 차가운 기계 부품 속에서 그런 따스함이 묻어 나온다는 말인가?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운 부분이었다. 소문을 들어보니 이들 사이버 로봇은 우리 회사 말고도 최근 몇 년간 기업체는 물론이고 사회 각 분야에 진출하여 고철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진짜 인간들을 순화시켜주는 '어른 인간'들의 면모를 보여주었고, 그런 순기능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고성능 무기로 그들을 창조한 인간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공상과학 소설 속의 지구 정복의 야욕이 아닌, 감정에 스며드는 영역 확장을 하는 듯했다.
사실 기업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효율성이 우선인 점을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선의의 공격이라면 인간도 변해야 할 것이다. 인간성 회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들과 같이 생활을 하면 우리도 변하지 않을까 하는 희망 섞인 기대도 해본다. 옛말에 근묵자흑 (近墨者黑)이라고 하지 않는가.
근무 중에 그 휴먼 로봇 친구는 일에만 몰입했고, 너무나 자신의 일처럼 해주었다. 딴짓도 일절 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내가 좀 쉬어 가면서 하라고 얘기를 해도 무리를 했다. 사이버 휴먼 로봇이라고는 하지만, 엄연히 생체 조절 장치가 있어서 사람처럼 쉬거나 기계 차원의 정비도 필요했다.
어느 날, 나는 이 친구가 건네준 리포트를 보게 되었다.
제목은 『(주)삼성포장의 판매 활성화 전략』,
슬쩍 물어보니 퇴근 후, 집에서 잠도 줄여가며 만든 자료라고 했다.
순도가 매우 높은 자발적인 자료였다.
내용도 충실했고,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나 역시 생각지 못한 부분도 더러 있었다.
이 친구의 손을 꽉 잡았다가 껴안고 등을 두드려줬다.
"진짜... 고맙네... 애썼네!"
"별말씀을요...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어요"
그동안 줄곧 지켜보아왔고, 이제는 월급을 대폭 올려줄 때라고 판단이 되었다.
내 마음에 쏘옥 드는 이런 인재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바야흐로 감동의 시대다.
(30년후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며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