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은 언제나 질문을 늦춘다
전자렌지에 밥을 데우며, 스마트워치로 심박수를 확인하고,
인공지능이 선별한 뉴스만 읽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우리는 기술을 통해 더 많이 알고, 더 빠르게 움직이며, 덜 불편하게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문득, 이렇게 편리해진 세상에서 우리는 얼마나 질문하고 있을까?
기술은 인간의 도구였지만, 지금은 질문을 생략하게 만드는 체계가 되었다.
우리는 그것을 '사용'하지만, 더 이상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영상만 보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길만 걷는다.
플랫폼이 정한 서비스만 소비하고, 검색창에 묻지 않은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술결정론이라는 말이 있다.
기술은 중립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는 힘이라는 뜻이다.
스마트폰이 생겨서 개인의 연결 방식이 바뀌었고, 유튜브가 생겨서 정치인의 말하기 방식이 달라졌다.
기술은 언제나 문 앞에 있는 조력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세계를 재설계하는 설계자다.
더 무서운 건, 그 설계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질 때 생기는 감각의 마비다.
배달 플랫폼이 결정한 수수료 구조, SNS가 설계한 ‘좋아요’ 시스템, 검색엔진이 선별한 정보 노출 순위.
이 모두는 익숙하다는 이유로 의심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그게 원래 그런 거니까" 라고 말하며 넘긴다.
하지만 도구는 언제나 목적을 내포한다.
도구가 설계된 방식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의 세계관을 제한한다.
전등은 밤을 낮처럼 만들었고, 인스타그램은 존재를 외형으로 환원시켰다.
모든 것은 디자인되고, 디자인은 관점을 강요한다.
기술은 마치 투명한 공기처럼 우리 일상을 감싸지만, 그 안에는 권력과 의도가 깃들어 있다.
누구를 연결할지, 무엇을 보여줄지, 어떤 정보를 누락할지.
우리는 그것을 점점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무감각은 민주주의에도 영향을 미친다.
알고리즘이 선별한 세계 속에서 사는 우리는,
점점 더 비슷한 의견만 접하게 되고,
질문 대신 확신만을 소비한다.
편리함은 질문을 미루고,
질문의 부재는 사유의 근육을 약화시킨다.
기술을 쓰는 건 좋다.
문제는 우리가 기술에 의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할 때다.
우리는 다시 질문을 회복해야 한다.
"이건 왜 이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이 기술은 누구에게 유리하고, 누구에게 불리하지?"
기술은 언제나 진보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지만,
그 진보가 진실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여전히 인간이다.
그리고 질문은, 인간이 남겨둔 마지막 저항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