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의 품격 part1

무기력이 내 마음을 두드렸다

by zeon
시침과 분침이 첫 번째 수직선을 그으면, 어김없이 날아드는 하루치 독촉장.


머리맡 스마트폰이 출근 시간을 재촉했다. 저 녀석은 밤새 충전됐는데, 난 왜 아직 방전상태일까. 중력에 붙들린 난, 겨우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가는 내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샤워기를 깨워 찬물을 내렸다. 이때, 허기진 잠이 화들짝 놀라 달아났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커피와 베이글 한 조각. 영양과 포만감은 이 시간에 누릴 수 없는 사치일 뿐이다. 우리 팀 박 과장은 오늘도 화사한 원피스와 향수를 고르며, 패션 리더를 완성하고 있을 것이다. ‘집이 먼 김 대리도 지금쯤, 나처럼 숨 가쁘게 달리고 있을 거야.’


한숨 돌릴 시간조차 내게 주어지지 않았다. 지하철 문이 열리면, 바로 자리 쟁탈전이 시작되기 때문이었다. 빽빽이 들어찬 사람들 속에서 작은 틈이라도 차지하기 위한 경쟁. 완충되지 못한 내 생존 에너지는 서서히 소모되고 있었다. 밀고 밀리는 가운데, 어느덧 익숙한 리듬이 들렸다. “이번 역은 구로디지털단지, 구로디지털단지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 문이 열리자마자,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숨 돌릴 틈도 없이, 거대한 파도가 나를 덮쳤다. 도시 위로 솟은 수직선, 그 빌딩마다 각자의 자리가, 임시 주인 대신 긴 밤을 버텨내고 있었다. 어김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풍경이었다.


굿모닝 하지 않은 굿모닝인사, 회의적인 부서 회의, 퇴근 없는 퇴근 시간, 존재 없는 존재.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있지만 없는 중첩상태였다. 서류 한 장의 가치도 갖지 못한 채, 그렇게 지워져 갔다.

“지온 씨, 점심 메뉴 좀 골라봐요.“

팀장은 명령 아닌 명령을 툭 던졌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속 햄릿이 되었고, ‘죽느냐 사느냐’가 아닌 ‘먹느냐 굶느냐’를 고민했다. 한국인의 사랑을 듬뿍 받는 김치찌개는 모범답안이었다. 나는 같은 곳이라도 맛있는 곳을 찾기 위해 구글창을 띄웠다. 식당에 매겨진 별점을 보는 순간, 회사의 다면평가가 스쳐 지나갔다. 김치찌개 식당처럼, 이름 없이, 이해 없이, 단순한 클릭만으로 나도 그렇게 수치화되고 있었다. 잘게 썰리고, 뜨겁게 끓여지고, 그릇에 담겨, 조용히 평가되는 동안,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인간은 ‘할 수 없는 자신‘을 마주하면 바로 무기력에 빠진다.


취직이란 목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시켰다. 도전, 노력, 성실, 열정. 나를 채웠던 무수한 말 중에는 무기력은 없었다. 그것은 낙오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내게 배정된 24시간, 그마저도 부족해서 잠을 줄였다. 영어 문장 하나를 더 외워야 했고, 자기소개서에 써넣을 스펙을 더 챙겨야 했다. 폼 나던 청춘은 닳아버렸지만, 정규직 월급이 보상해 줄 거라고 확신했다. 가슴 떨렸던 합격 발표 순간, 기대 속 첫 출근, 달콤했던 첫 월급까지. 모든 게 내 인생에 놓인 레드 카펫이었다. 난 인생 영화의 주연처럼 그 위를 걸었다. 희망 넘치는 미래를 꿈꾸며. 이것이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앞으로 이어질 본편의 시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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