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밤, 나는 살아 있다 part1

지금 난 내 의지대로 살고 있는가

by zeon
밤은 내향인의 시간이다.


도시의 소음이 꺼지면, 비로소 내가 켜진다. 사람들이 조용하게 퇴장하고, 나는 내면으로 깊숙이 스며든다. 아메리카노나 와인은 밤을 즐기는 입장권이다.

오늘은 버건디빛 이탈리아 와인을 한 잔 따랐다. 첫 모금으로 입 안을 채우고, 두 모금으로 나를 찾았다. 살며시 나로 돌아오려던 순간, 스마트폰이 몸을 떨었다. 밤 9시 반. 잔잔한 고요를 깨는 진동음, 내가 아닌 ‘선임’을 찾는 것이 분명했다.


”네, 지온입니다.“

”선임님, 지금 염산 배관에 문제가…“

”지금 갈게요.“


숙소에서 공장까지는 10분. 염산이 흘러넘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채 비우지 못한 와인, 하지만 내 혈관 속을 타고 흘렀다. 생각할 겨를 없이 난, 무작정 뛰었다.

화학물질관리자라는 또 다른 이름, 공장 안 유독물질 탱크에 진하게 새겨졌지만, 그 어디에도 ‘지온’이라는 흔적은 없었다. 오직 긴급상황 대비, 화학물질관리법이 정한 의무보다 더 크고, 10톤 탱크보다 더 무거운 책임감만 묻어있을 뿐이다.


“선임님, 여기요!”

화학반 점검원은 메인밸브를 잠그고, 유출된 염산을 물로 희석하는 중이었다.


“상황은 어때요?“

”다행히 페트롤 중 배관을 타고 떨어지는 걸 보고, 바로 조치해서 유출량은 소량입니다.“

강산이면서 유독성 증기까지 내뿜는 녀석이다. 10분만 더 늦었더라면, 직원은 물론, 인근 주민까지 위험했을 것이다. 일단 난 숨을 고르고, 보호장구를 주섬주섬 걸쳤다. 배관 쪽에 다가서니 가늘고 긴 ‘크랙’이 흐리게 파여 있었다. ‘찰칵.’ 유출이 시작된 그곳은, 어쩌면 나와 ‘선임’ 사이의 붙을 수 없는 틈처럼 보였다. 나 역시 그 틈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점점 더 커지는 틈 사이로 점점 더 많이.


긴급 조치는 끝났고, 팀장에게 보고하기 위해 폰을 꺼냈다. 전화로 알리기엔 살짝 부담스러운 밤 시간이라, 간단한 경과를 카카오톡으로 보냈다.

‘팀장님, 21시 30분경, 3 공장 염산저장탱크에서 경미한 염산 누출 사고가 발생되었습니다. 화학반원이 일찍 발견한 결과, 유출량은 방재센터 보고 비대상인 소량입니다. 피해상황은 배관 크랙 정도이며,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현재 희석 조치는 완료되었고, 내일 출근 즉시 수선공사를 발주하겠습니다.’

5분 후, 팀장에게 답장이 왔다.

‘수고했어요, 내일 추가 배관 손상은 없는지 확인해 주세요.’

건조하지만, 묵직한 반응에 얼른 폰을 집어넣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커피 한 잔 사 드릴게요.”

점검원에게 가볍게 인사한 뒤, 공장을 빠져나왔다. 와인이 들어온 탓일까, 긴장이 빠져나간 탓일까. 난 바로 숙소로 들어가지 않고 밤거리를 걸었다. 방향도 목적도 없이 그냥 걸었다. 가로등 아래 길게 뻗은 거리와 낙동강 위를 잇는 다리, 익숙한 풍경이었다. 어제와 다름없는 이곳에서 낯선 건, 오직 나 하나. 숨 쉬는 게 존재의 이유라면, 걷는 건 의지의 증명이다. 그 순간, 어둠이 삼켜버린 가냘픈 빛 사이로, 꺼졌던 내가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공장까지 달린 건 내 의지가 아니었지만, 지금 걷는 건 순수한 내 의지였다.


’난 내 의지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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