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걷는 밤, 나는 살아있다 part2

나는 걷는다, 고로 살아있다

by zeon

한 걸음, 두 걸음.


어쩌면 혼자 걷는 이 밤은 타인의 시선과 강박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이었다. 직장에서는 ‘일잘러’, 집에서는 ‘K-장남‘, 사회에서는 ’MZ’. 나를 외면했던 말들의 파티 속에서 분주하게 뛰어야 했던, 낮은 내가 없는 시간이었다. 차량의 행진이 멈추고, 사이렌이 잠들었을 때, 나는 다시 깨어나고 있었다. 도시 속 과잉이 한순간 침묵하는 이 시간만이, 나를 돌보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밤이, 내 손에 초대장을 들려주었다. 거부할 수 없는 속삭임에 이끌려 서서히 들어갔다. 한 걸음도 내 것이었고, 두 걸음도 내 것이었다.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긴급회의가 소집되었다. 예상대로 염산 유출 사고에 대한 회의였다.

“지온 씨, 사고 경위부터 공유합시다.”

나는 팀장의 지시로 전날 발생된 사고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이후 발생 원인과 해결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염산 탱크의 배관 시공이력 좀 알아보세요.“

”해당 배관은 저장탱크 2021년 신규 설치 때 시공된 것입니다.“

”이후 공사는 없었나요?“

”네, 특이사항 없이 관리되고 있었습니다.“

”외부 충격은 없었나요?“

”격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이고, CCTV에서도 충격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펌프 작동으로 반복적인 진동은 있었을 것입니다.“

“모니터링 시스템은 어떤가요?”

“감지기 반응이 화학반으로 전달되어 빠르게 조치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의견과 현 상황에 대한 말들이 오고갔다. 근본적 해결은 이상이지만, 미봉적 대처는 현실이었다. 한참 가동 중인 생산공정을 멈출 수 없었고, 전수조사할 인력과 시간도 부족했다. 손상 배관에 대한 수선과 패트롤 강화라는 미온적 결론으로 회의는 끝났다.


낮은 역시 외향인의 시간이다. 도시의 소음이 켜지면, 언제나 내가 꺼진다.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다시 난 내면으로 깊숙이 숨어든다. 담배나 에스프레쏘는 낮을 견디는 피난처이다.

오늘은 진고동빛 머신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첫 모금으로 잠을 내쫓고, 두 모금으로 나를 덮는다. 선명하게 나를 깨우려던 순간, 알림창이 얼굴을 내밀었다. 오후 2시 반. 나른한 권태를 지운 알림음, 낭보가 아닌 ‘업무’를 전하는 것이 확실했다.


낮에는 ‘선임’으로 살았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나를 잠시 지웠다. 업무 지시대로 움직였고, 규정대로 생각했다. 업무와 관계없는 코딩 자격도 취득해야 했다, 단지 그룹사 정책이라는 이유로. 그런 낮은 인정과 성과를 위한 강요로 가득한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지온’의 결로 돌아온다. 껍데기는 벗고, 내가 된다. 무엇을 하든, 아무것도 하지 않든, 나는 가장 선명해진다. 더 선명해지기 위해 조용히 문을 열고, 한 발짝 내딛는다. 낮에는 익숙한 골목이 밤에는 낯설었다. 하지만 그 낯섦이 나를 더 선명하게 만든다. 대화도 없고 갈 곳도 몰랐지만, 분명한 건 나를 향해 가고 있었다.


너도 빛나고, 나도 빛난다. 모든 존재는 각자의 빛을 가지고 태어났다. 다만 낮에는, 너와 내가 뒤섞여 그 빛이 희석될 뿐이다.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기다리는 것이다. 밤이 되면, 다시 돌아오길. 그래서 밤이 좋다. 조용히 걸으면서 나를 찾는 밤이라 좋다.


데카르트는 생각이 존재를 증명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나를 증명하는 건,

오늘도, 그저 한 걸음.

‘나는 걷는다, 고로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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