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식당 안, 평온을 깬 것은 날카로운 고성이었다.
"이런 싸가지없는 놈! 애비 애미도 없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잔뜩 성이 난 노인이 서 있었다. 종업원의 사소한 실수, 혹은 말대꾸가 발단이었을 것이다. 그는 붉어진 얼굴로 삿대질을 해댔다. 단순히 화를 내는 수준이 아니었다. "나 지금 기분 나빠!"라고 온몸으로 악를 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표정을 훑어보았다. 처음엔 '무슨 일인가' 싶어 놀란 토끼 눈이더니,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저 사람이 저 노인에게 잘못을 했나보구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그저 '어디서 저런 사람이 굴러들어왔나' 하는 경멸의 눈빛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마시던 물조차 비릿하게 느껴져 컵을 내려놓았다.
사실 대우를 받을 때, 모두가 나를 치켜세워 줄 때 점잖은 척하는 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연기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인자한 미소를 짓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람의 진짜 인격, 그 민낯이 드러나는 순간은 따로 있다. 바로 내 의견이 공격당하고, 내 생각이 부정당한다고 느낄 때다.
물론 자신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 유쾌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이상하게도 그 불쾌함의 낙폭은 더 크고 깊어진다. 세월과 함께 쌓인 것은 지혜여야 하는데, 종종 그것은 두꺼운 자존심의 껍질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그 껍질이 건드려지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 쉽게 "감히?"라는 오만의 덫에 걸려든다. 저 노인의 고함은 어쩌면 특별한 악인의 것이 아니라, 감정의 제동 장치가 고장 나버린, 우리가 경계해야 할 슬픈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멋진 어른과 소위 '꼰대'의 갈림길은 바로 그 지점에서 나뉜다. 꼰대는 자기 식대로 오해하고 곡해한 뒤, 그 위에 '나이'라는 벼슬을 얹는다.
"너 나이가 몇이야?"
이 말은 번역하면 "나 지금 기분 더러우니까, 네가 알아서 기어라"라는 떼쓰기에 불과하다. 심지어 부모까지 들먹이며 막말을 퍼붓는 건, 인격의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런 폭주를 마주한 상대방에게 남는 선택지는 딱 두 가지뿐이다. 같이 맞대꾸해서 저 노인을 우스운 꼴로 만들거나, 아니면 ‘똥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라며 고개를 돌려버리거나.
어느 쪽이든 비참하기는 매한가지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육체가 늙는 것처럼 마음도 배설물처럼 더러워지는 과정인 걸까? "나 똥이야, 더럽지? 그러니까 피해!"라고 소리치는 게 권위라고 착각하는 걸까?
늙음이 낡음이 되고, 결국엔 피하고 싶은 오물이 되어버리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노년의 비극이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며 '어른'이 되고, 거기서 더 나아가면 '어르신'이 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호칭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 기분을 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삭히고 걸러내는 거름망을 촘촘히 짜야 한다. 누군가 내 의견을 반박할 때, 버럭 화를 내며 나이 훈장을 꺼내 드는 대신, 쓴웃음 한 번 짓고 넘어갈 수 있는 여유.
저렇게 늙어가지는 말아야지.
오늘 본 그 씁쓸한 풍경을 반면교사 삼아 다짐해 본다.
내 나이 듦이 누군가에게 피하고 싶은 '더러움'이 아니라, 곁에 머물고 싶은 '그리움'이 되기를.
부디 내 마음의 향기가 고약해지지 않도록, 오늘도 묵묵히 내 안의 찌꺼기를 닦아내 본다.
나이를 벼슬 삼아 기분을 배설하는 순간,
당신은 어른이 아니라 피하고 싶은 얼룩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