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여행은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것이다

by Tugboat


닳은 캐리어와 익숙한 횡단보도

바퀴가 반쯤 닳은 회색 캐리어를 끌고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온다. 유난히 바람이 거센 나리타공항의 바람이 옷을 여미게 만들고, 노래하는 듯한 일본어 안내방송이 소음처럼 섞인다. 벌써 몇 번째인지 세어보다가 그만둔다. 이번에도 또 도쿄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향한 곳은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 신호등이 바뀌자마자 쏟아져 나오는 수천 명의 인파. 그 거대한 흐름 속에 몸을 맡긴다. 서울 종각의 횡단보도보다 더 자주 건넜을 이 길. 타인과 어깨가 부딪치지 않게 본능적으로 몸을 비트는 내 모습이 너무나 자연스럽다.


구글 지도를 켤 필요도 없다. 저 골목으로 올라가면 스페인자카가 나올 것이고, 그 옆 자판기에는 내가 좋아하는 복숭아 물이 있을 것이다. 여행지라기보다는, 마치 잠시 비워둔 옆 동네 자취방에 돌아온 기분이다. 문득 쇼윈도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설렘보다는 안도감이 묻어있는 얼굴.




나는 고여있는 물일까


사실 가끔은 민망할 때가 있었다.

"이번 휴가 때 어디 가?"라는 누군가의 질문에 "일본, 또 도쿄야."라고 대답할 때의 그 머쓱함. 누군가는 오로라를 보러 아이슬란드로 가고, 누군가는 남국의 휴양지에서 무더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는 낭만을 즐기러 떠난다는데, 나는 기껏해야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닿는 곳, 그것도 이미 닳도록 가본 곳을 또 간다.


서점의 여행 코너에 가면 '새로운 나를 만나는 법', '낯선 곳에서의 도전' 같은 문구가 적힌 책들이 으름장을 놓는 것만 같았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디고, 길을 잃어보기도 하고, 낯선 언어와 씨름하며 세계관을 넓히는 것이라 배웠으니까. 그래야만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쓸만한 가치가 있다고 들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나의 여행은 너무나 안전하고 게으른 선택처럼 느껴졌다.


'나는 모험심이 거세된 중년이 되어버린 걸까?'


'그 돈과 시간을 들여 고작 익숙함을 사러 온 건가?'


남들이 SNS에 올리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웅장한 협곡 사진을 보며, 시부야의 스타벅스 창가에 앉아 있는 나 자신이 묘하게 초라해지곤 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데, 내 여행도 그저 고여있는 웅덩이 같아서.




여행은 '새로운 땅'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

하지만 뜨거운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며 창밖의 교차로를 하염없이 내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우리가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몇 년 뒤에 다시 꺼내 읽는 이유와 비슷하지 않을까.


줄거리도 알고 결말도 알지만, 다시 읽을 때마다 밑줄 긋는 문장이 달라진다. 20대에 읽었을 때는 보이지 않던 주인공의 한숨이, 40대가 되어 다시 읽으니 가슴을 찌르는 비수가 되는 것처럼 말이다. 텍스트는 그대로지만 읽는 '나'가 변했기 때문이다.


여행도 그렇다. 시부야의 횡단보도는 그대로지만, 그 길을 건너는 나는 매번 다르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갓 제대한 혈기왕성한 청춘이었고, 그 다음엔 정장을 입고 비즈니스 출장으로 이 곳을 찾았었다. 누군가와 함께 떠나기로 한 여행에 내 지식을 자랑하고싶어 무리를 이곳으로 이끌어 왔던 적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 조금은 지치고 무뎌진 중년의 내가 걷고 있다.


매번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 '탐험'이라면, 같은 곳을 다시 찾는 여행은 '성찰'이다.


지도를 보느라 급급하지 않아도 되기에, 비로소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길을 잃을 걱정이 없기에, 내 마음의 소리에 더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익숙한 배경지 속에서 확인하는 건 변하지 않는 도시의 풍경이 아니라, 그 풍경 앞에 선 내 마음의 궤적이다.


그러니 나는 헛돈을 쓴 것이 아니다. 낯선 풍경 대신 '나를 마주할 여유'를 산 것이다. 낯선 곳에서는 긴장하느라 보지 못했던 내 내면의 지도를, 가장 편안한 타지(他地)에서 찬찬히 펼쳐보고 있는 것이다.




나의 여행은 나만의 '아지트'를 찾아떠나는 그것

내가 종각보다 시부야를 더 자주 걷는 건, 그곳이 나에게 허락된 가장 완벽한 '익명(匿名)의 안식처'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을 아는 거리. 그 기묘한 밸런스가 주는 위로가 분명히 있다.


그 익숙함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세상 모든 사람이 콜럼버스가 되어 신대륙을 찾아 나설 필요는 없다. 어떤 이에겐 매일 달라지는 파도보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등대가 더 필요한 법이니까.


이번 여행에서도 구글 지도는 잠시 꺼두어도 좋겠다. 나의 발이 기억하는 그 라멘집으로 가서, 늘 먹던 메뉴를 시키고, 변함없는 국물 맛에 안도하는 것. 그것만큼 확실한 행복도 없지 않은가.


어쩌면 최고의 여행은, 돌아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확인하기 위해' 떠나는 것 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전히 안녕한지를.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 밑줄 긋는 문장이 달라지듯,
같은 곳을 여행할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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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