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by Tugboat

늦은 밤, 스탠드 불빛만이 책상 위를 동그랗게 비추고 있다. 그 좁은 원 안에는 지난 여행의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구겨진 박물관 입장권, 수북이 쌓인 영수증, 그리고 지금 막 편집을 위해 컴퓨터로 옮겨놓은 사진 파일들.

오래전, 광고 회사에 몸담았던 시절 내 마음을 뒤흔들었던 카피 한 줄이 떠오른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참 멋진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밤, 이 널브러진 '기록'들을 내려다보니, 그 문장은 단순히 멋진 말이 아니라 어떤 섬뜩한 예언이나 주문처럼 느껴진다.


문득 이번 여행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아주 오래된 폴더하나를 열어보았다.


그러다가 시선이 멈춘 사진하나. 그 속의 나는 에펠탑 앞에서 세상 다 가진 표정으로 웃고 있다. 저 웃음은 박제되어, 이제 내 기억의 주인이 되려 하고 있다.




나는 사실, 그때 웃지 못했다


솔직해지자. 사진 속 저 순간, 나는 사실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시차 적응에 실패해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함께 간 광고주의 점심 메뉴에 대한 은근한 불만토로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때였다. 신발 마저 잘못 챙겨간 탓에 발바닥에는 물집이 잡혀 한 걸음 뗄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올라왔었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사진이라는 기록을 마주하는 순간, 그 찌질했던 고통과 짜증은 증발해 버린다. 남은 건 '화창한 날의 완벽한 미소' 뿐이다.

비단 여행뿐일까. 죽을 만큼 힘들어서 매일 밤 베개에 머리만 대면 기절하듯 잠들었던 군 시절의 사진을 봐도 그렇다. 흙먼지 뒤집어쓴 채 전우들과 어깨동무하고 찍은 사진을 보면, "그때가 낭만이었지"라며 헛웃음을 짓는다. 그 시절 겪었던 부조리와 추위, 밑바닥의 감정은 기록 뒤로 숨어버렸다. 나를 할퀴고 떠난 옛 연인과의 사진도 마찬가지다.


나는 가끔 이런 내가 두렵다. 내 삶의 진실은 고통과 지루함, 그리고 비겁함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기록이라는 놈이 자꾸만 내 인생을 근사한 드라마로 조작하는 것 같아서다. 기억이 기록에게 먹혀버리는 기분. 나는 쿨하게 과거를 추억하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씁쓸함이 밀려온다.




기록은 삶을 견디게 하는 다정한 편집


하지만 다시금 곰곰이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이 '조작'은 우리 뇌가 살아남기 위해 부리는 필사적인 마법이 아닐까.


인간의 기억이란 참으로 영악하고도 편리해서, 살기 위해 아픈 것들을 도려낸다. 만약 우리가 겪은 모든 고통과 모멸감, 슬픔을 날 것 그대로 생생하게 기억한다면, 우리는 아마 제정신으로 내일을 맞이할 수 없을 것이다.

기록이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은, 기록이 진실을 덮는다는 뜻이 아니라 '기록이 우리에게 필요한 위로만을 남겨준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사진 속의 그 환한 미소는 거짓이 아니다. 고단한 여행길 속에서도, 힘겨운 군 생활 속에서도, 찰나의 순간만큼은 정말로 웃고 싶었던 내 의지였을 것이다. 기록은 그 찰나의 의지를 붙잡아 '이것이 너의 본질이었다'고 다독여주는 장치다. 늙어가는 것이 서글픈 게 아니라 농익어 가는 것이라 믿게 하고, 이별이 상처가 아니라 성장이었다고 믿게 만드는 힘. 그것은 왜곡이 아니라, 삶을 긍정하려는 '다정한 편집'이다.




당신의 기록이 당신을 지키기를


책상 위 영수증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앨범 귀퉁이에 꽂는다. 이 종이 조각들은 이제 나의 진짜 기억이 될 것이다. 다리가 아팠던 기억 대신 아름다웠던 감동의 기억으로, 다퉜던 기억 대신 화해의 잔을 기울이던 기억으로.


여행에서 돌아와 짐을 풀며 밀려오는 허무함, 흔히들 말하는 여행 후유증은 어쩌면 다시 현실의 무게를 짊어져야 하는 우리에게 기록이 건네는 예방주사 같은 것일지 모른다.


지금 당신의 휴대전화 속에, 서랍 속에 잠자고 있는 기록들을 너무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그것이 조금 미화된 모습이라 할지라도, 그 아름다운 착각이 있기에 우리는 또다시 퍽퍽한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게 아니겠는가.

당신이 남긴 그 한 장의 사진이, 훗날 당신의 힘겨운 날을 지배해 주기를. 부디 따뜻하고 찬란하게 지배해 주기를 바란다.


우리가 남긴 기록은 과거의 증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남겨둔 다정한 거짓말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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