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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시간과 공간, 절대가 아니었다

1. 과학, 흔들리는 진리를 따라

by 홍종원

카페의 조명이 조금 어두워졌을 때,
수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교수님,
마이컬슨과 몰리의 실험 결과,
빛의 속도는 어떤 방향, 어떤 시간, 어떤 조건에서도 항상 같다는 사실이 확인됐잖아요."


최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 실험은 당시 과학자들에게 큰 충격이었죠.
에테르가 있다면,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빛의 속도가 달라져야 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측정해도 빛의 속도는 늘 똑같았어요.
방향과 관계없이."


수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때 과학자들은 정말 방법이 없었던 건가요?
아무도 설명을 못 했던 거예요?"


최 교수가 작게 웃었다.
"그랬죠.
모두 막막해하던 상황에서,
아인슈타인이 완전히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겁니다.
그는 과감한 도전을 했어요.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하다는 실험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신 시간과 공간이 변화된다고 본 거죠."


최 교수가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는 두 가지 공리를 세웠습니다.
첫째, 어떤 관성계에서도 물리 법칙은 동일하다.
둘째, 빛은 진공 속에서 항상 일정한 속도로 전파되며, 어떤 관성계에서 측정하든 그 속도는 동일하다."


그 말을 들은 수현이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관성계...라는 건 뭔가요?"


최 교수가 부드럽게 설명했다.
"관성계는 쉽게 말해,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거나 정지해 있는 관측자의 입장이에요.
예를 들어,
창밖으로 조용히 지나가는 기차 안에 있는 사람도,
멈춰 있는 우리도 서로의 움직임을 일정한 속도로 본다면, 둘 다 관성계인 거죠."


"아... 그러니까 가속하지 않고, '평온하게 움직이는' 기준에서 본 세계네요."


"맞아요.
바로 그 '관성계'들 사이에서는 물리 법칙이 같다는 걸 아인슈타인은 '공리'로 삼은 거예요."


"공리라면...?"


"쉽게 말해,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않고 출발점으로 받아들이는 기본 가정이에요.
수학에서도 그렇고, 과학에서도 때때로 이렇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원리를 먼저 세워요.
그걸 바탕으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죠."


"음... 그럼 이 두 가지 공리를 받아들이면...
기존 시간과 공간 개념이 안 맞게 되는 거 아닌가요?"


"맞아요.
아인슈타인은 빛의 속도를 고정시켜 놓고,
대신 시간과 공간이 달라진다고 본 거예요.
움직이는 속도에 따라,
관측자마다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 달라진다는 것.
그게 바로 특수상대성이론의 핵심이에요."


잠시 생각에 잠긴 수현이 노트북을 다시 펼치려다 말고 말했다.
"시간과 공간이 바뀐다는 말은... 말로는 이해되는데, 직관적으로는 잘 안 와닿아요."


"당연해요.
우리 대부분은 시간과 공간이 절대적인 배경이라고 생각하죠.
뉴턴 이후 수백 년 동안 과학자들조차 그렇게 믿어왔으니까요."


최 교수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 믿음을 깨뜨렸어요.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 틀이, 그 순간부터 완전히 달라진 거죠."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하나의 전제를 포기해야 했다.
바로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여기에서부터 아인슈타인은 전혀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다.
속도는 ‘거리 ÷ 시간’이라는 식으로 계산된다.
빛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시간이나 거리(공간) 중 하나가 변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무시무시한 논리를 품고 있다.
속도는 바뀔 수 없다.
그렇다면 시간이 바뀌어야 한다.
또는 거리 즉 공간이 바뀌어야 한다.
아니면 둘 다.


그 결과 아인슈타인은 낯설지만 혁명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
공간도 누구에게나 똑같이 펼쳐져 있지 않다.


만약 누군가가 빛에 가까운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는 시간이 더 천천히 흐른다.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세상의 길이도 실제보다 짧아진다.


예를 들어,
우주선을 타고 광속의 90%로 이동하는 사람은 지구에 있는 사람보다 훨씬 느리게 시간이 흐른다. 우주선 안의 시계는 더디게 움직이고, 우주선이 바라보는 우주의 길이는 수축되어 짧아 보인다. 만약 그가 수년 후 지구로 돌아온다면, 본인은 몇 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구에서는 수십 년이 흘러 있을 수도 있다.


처음 듣는 사람에겐 이 모든 것이 터무니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수많은 실험이 이것을 뒷받침했다.


GPS 위성은 지구보다 높은 궤도를 따라 지구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 그 위성에 탑재된 정밀한 시계는 지구에서의 시계와는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른다. 왜냐하면, 위성은 높은 고도에 있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덜 받아 시간이 더 빠르게 흐르고, 동시에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특수상대성이론에 따라 시간이 더 느리게 흐른다.


이 두 가지 효과는 서로 반대 방향이지만, 둘 다 실제로 측정 가능할 만큼의 영향을 준다. 따라서 이 차이를 보정하지 않으면, GPS의 위치 정보는 하루 만에 수 킬로미터씩 엉킬 수도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지도 앱과 내비게이션 서비스가 정확한 이유는 바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덕분이다.


수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교수님.
그런데요, 아까 말한 그 두 공리요.
그건 그냥 가정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걸 믿고 이론을 만들 수 있었던 걸까요?
과학이라면, 뭔가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최 교수는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말하면, 공리는 증명하지 않는 출발점이에요.
그 자체를 논리적으로 입증하지는 않죠.
하지만 그 공리에서 출발한 이론이 현실을 잘 설명하면,
그 공리도 함께 받아들여지는 거예요.”


“음… 수학처럼요?
일단 공리를 세우고, 거기서 모든 걸 유도해 나가는 식으로?”


“맞아요.
아인슈타인도 그랬어요.
빛의 속도가 항상 일정하다는 실험 결과,
예를 들어 마이컬슨-몰리 실험처럼
계속 반복되는 실험들이 그걸 보여주고 있었죠.
그래서 그는 그걸 공리로 삼았고,
그 공리에서 출발한 특수상대성이론이
놀랍도록 현실을 잘 설명하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니까... 직접 증명된 건 아니지만,
그 공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론이
현실을 정확히 예측하니까,
결국 그 공리도 신뢰받게 된 거네요.”


“그렇죠.
특수상대성이론은 이후 수많은 실험에서 검증됐어요.
입자 가속기, GPS 위성, 쌍둥이 역설 같은 시간 지연 효과까지.
모두 이 공리에서 출발한 결과들이고요.”


수현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론이 현실을 이긴 거네요...
상상으로 만든 공식이,
실제로 세상을 바꿔버린 거잖아요.”


최 교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과학이 가진 가장 멋진 힘이에요.
보이지 않던 진실을 먼저 받아들이는 용기.
그것이 때때로,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여니 까요.”


이제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단단하고 고정된 무대가 아니다.
관측자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지는, 유동적이고 살아 있는 세계의 일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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