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은 커튼을 반쯤 걷었다.
회색빛 하늘이 창 너머로 펼쳐졌다.
책상 위로 스며드는 빛은 희미했지만, 그만큼 생각을 붙들기에 좋았다.
비가 올 것 같았다.
어딘가 눅눅하고, 조금은 무거운 공기.
며칠 전 교수님이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과학은 결국 세상을 해석하는 틀이에요.
단지 지식을 쌓는 게 아니라, 시선이 바뀌는 거죠.”
그땐 잘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책상 위에는 《프린키피아》 복사본과
‘라플라스의 악마’에 대한 논문 몇 장이 흩어져 있었다.
페이지 끝이 접히고, 형광펜 자국이 곳곳에 남아 있는 낡은 자료들.
그건 마치 오래된 세계를 다시 읽어 내려가는 일 같았다.
수현은 볼펜을 들어 노트를 펼쳤다.
천천히, 마치 누군가에게 들려주듯 문장을 써 내려갔다.
뉴턴 이후, 과학은 놀라운 자신감을 얻었다.
아니, 어쩌면 ‘오만’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정밀한 기계로 여겨졌다.
하나의 톱니가 움직이면, 그에 맞춰 다른 톱니도 정확히 반응하는 세계.
모든 현상은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고,
그 모든 연결은 수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은 그 기계의 구조를 해부했고, 법칙을 발견했고,
마침내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에 도달했다.
뉴턴의 법칙은 그런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제 모든 것은 예측 가능하다.”
“수식만 알면,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
그 말에 수많은 학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프랑스의 수학자 피에르 시몽 라플라스가 등장했다.
그는 말했다.
“만약 전능한 지성이 지금 이 순간,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안다면,
그 존재는 과거와 미래를 완벽히 예측할 수 있다.”
그 지성을 사람들은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불렀다.
그것은 하나의 은유였다.
우주를 계산 가능한 질서로 보는 시선,
모든 것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의 세계관.
그 안에선 자유의지도, 우연도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수학이라는 언어로 이미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시기, 과학은 산업혁명과 손을 맞잡았다.
열역학과 전자기학, 기계공학은 전례 없는 속도로 발전했고,
인류는 증기기관을 만들었고, 철도를 깔았고, 전신으로 대륙을 연결했다.
수식은 기계가 되었고,
기계는 인간의 손과 발을 대신했다.
자연의 법칙은 기술의 재료가 되었고,
그 기술은 인간의 야망을 실현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세상은 움직였고,
인간은 점점 더 신의 자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믿었다.
수현은 펜을 멈췄다.
창밖 유리창에 작은 빗방울이 맺히고 있었다.
바람도, 빛도, 소리도, 모두가 잠시 멈춘 듯한 고요한 순간.
그녀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모든 게 수식으로 설명된다... 정말 그런 걸까.”
정확하게 맞물린 톱니처럼,
정밀하게 작동하는 기계처럼,
우주는 그렇게 설명되어 왔다.
수학과 법칙, 예측 가능한 자연의 논리.
그것은 분명히 강력한 도구였고,
수많은 기술과 문명의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그 안 어딘가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속도와 위치만으로는 다 담기지 않는 어긋남.
측정할 수 없는 찰나의 흔들림들.
그것들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수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수학과 법칙, 예측 가능한 자연의 질서.
그 확신의 틈 사이로 조용히 스며드는 낯선 기운이 있었다.
‘시간’과 ‘공간’.
언젠가 교수님이 이야기했던 단어들이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맴돌았다.
수현은 창밖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하지만 자신에게 다짐하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건... 내일 교수님께 여쭤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