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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확률, 미래의 언어

1. 과학, 흔들리는 진리를 따라

by 홍종원

수현이 테이블 위에 놓인 동전을 들었다.
"교수님, 확률이란 게 결국 미래를 예측하는 거 아닌가요?
예를 들어, 이 동전을 던졌을 때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맞히는 거죠?"


최 교수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쉽죠.
하지만 확률은 개별 사건을 '맞히는' 학문이 아닙니다.
확률은 경향을 말해주는 학문이에요.
예를 들어, 동전을 많이 던졌을 때 앞면이 절반쯤 나올 거라는 건 알려줍니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동전이 앞면일지 뒷면일지는 절대 말해 주지 않아요."


확률론의 본질은 가능성을 수량화하는 데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숫자로 표현하면,
우리는 그 사건이 반복될 때 어떤 경향을 가질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경향의 예측이지, 한 번의 결과를 맞히는 게 아니다.


동전 던지기를 생각해 보자.
앞면이 나올 확률이 1/2이라는 건 명확하다.
하지만 이번에 던지는 동전이 앞면일지 뒷면일지는 알 수 없다.
이건 장비나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사건 자체의 무작위성 때문이다.


수현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확률로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건가요?"


"그건 아닙니다."
최 교수가 손을 저었다.
"확률은 개별 사건의 결과는 못 맞혀도, 미래의 경향을 알려줍니다.
예를 들어, 보험회사는 사고 확률을 계산해서 보험료를 정하죠.
사고가 정확히 언제, 누구에게 날지는 몰라도, 전체 고객 중 몇 %가 사고를 낼지는 예측할 수 있는 겁니다."


수현이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내일 비 올 확률이 70%라는 건... 거의 온다는 뜻 아닌가요? 50%가 넘었으니까요."


최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70%라는 건 '10번 중 7번은 비가 왔다'는 과거 데이터를 말하는 겁니다.
기온, 풍향, 습도 같은 조건이 지금과 비슷했던 날을 찾아본 거죠.
그러니까 이번에 비가 올 가능성이 70%라는 뜻일 뿐이지,
무조건 온다는 보장은 전혀 없어요. 나머지 30%에서는 비가 안 왔으니까요."


수현이 웃었다.
"그럼 비가 안 와도 틀린 린건 아니네요."


"그렇죠. 확률은 가능성의 크기일 뿐, 운명이 아니니까요."


잠시 후, 수현이 또 물었다.
"주식 예측도 비슷한 건가요?"


"네, 똑같아요."
최 교수가 말했다.
"주식 차트를 보면 반복되는 패턴이 있긴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주식이 5일 연속 오르면 그다음 날 하락한 경우가 과거 데이터에서 55%였다고 합시다.
그건 '비슷한 조건에서 100번 중 55번은 떨어졌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이걸 100% 떨어진다고 말하는 건 거짓말이죠.
실제로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 그 55%마저도 시간이 지나면 더 낮아집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날씨나 주식이나, 확률은 방향을 알려줄 뿐이지, 정답은 아니군요."


"맞아요. 확률은 지도는 줄 수 있지만,
그 길로 갈지는 결국 선택에 달려 있는 거죠."


확률은 불확실성을 줄이는 도구다.
주식 투자, 날씨 예보, 시험 문제 예상까지,
우리는 확률을 이용해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
중요한 건, 확률은 '결과를 맞히는 마법'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언어라는 사실이다.


최근 서점에 가면 "확률~하는 법", "확률적 사고" 같은 제목이 붙은 책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건 단순한 유행어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비결정론적이라는 인식,
즉 '이번에 일어날 일'을 절대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표현이다.
경험적으로나 과학적으로, 그리고 철학적으로도
확률은 이미 세상을 이해하는 핵심 도구가 되었고,
우리는 그 언어로 미래를 해석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확률은 점쟁이가 아니라, 길잡이 같은 거군요."


최 교수가 웃었다.
"맞아요. 확률은 확실한 미래를 알려 주진 않지만,
불확실한 세상에서 우리가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도와줍니다.
그게 확률이 가진 가장 큰 힘이죠."




『확률적 진실: 우리는 얼마나 맞는 말속에 사는가』 중에서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까?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은 단순한 외모 선호를 넘어, 사회적 성공과 개인의 만족을 연결 짓는 심리적·문화적 신념을 반영한다. 이 말은 단지 외모에 대한 개인 취향의 문제라기보다는, 외모를 둘러싼 사회적 가치와 시대적 배경, 그리고 관계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동시에 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 말이 힘을 얻게 된 배경에는 1990년대 이후 급격한 소비자본주의의 확산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가 깊이 작용했다. 텔레비전 드라마, 연예인 중심의 대중문화, SNS의 시각 중심 소통은 ‘잘생김’을 단순한 외모 특성 이상의 사회적 자산으로 만들었다. 잘생긴 사람은 단지 보기 좋다는 이유만으로 호감을 얻고, 그로 인해 더 많은 기회를 받는다. 이런 경험은 많은 사람들에게 “외모는 결국 성공과 행복의 지름길이 아니냐”는 직관을 심어주었다. 실제로 ‘매력 자본(Lookism)’이라는 용어는 이러한 구조를 지적한다.


개인 심리 차원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 특히 결혼이라는 인생의 큰 선택 앞에서 “확실한 가치”를 찾으려는 경향이 반영된다.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적어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심리적 위안이 작동하는 것이다. 외모는 시간 초반에는 ‘확실성’처럼 작동하기 쉽고, 상대의 성격이나 내면은 그에 비해 알기 어렵다는 인식이 이런 판단을 강화시킨다. 요컨대, 이 말은 “보장된 행복”에 대한 심리적 기대와 외모에 대한 사회적 가치가 겹쳐진 결과다.


또한 유교적 전통에서 결혼은 ‘좋은 짝을 얻어 가문을 번성시킨다’는 구조적 기능을 강조해 왔다. 부모 세대의 결혼 조언 중 “괜찮게 생긴 사람을 만나야 대우받는다”는 말은 반복적으로 등장해 왔다. 외모는 단지 연애의 조건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서의 대우와 가치 평가에 영향을 준다는 문화적 맥락 속에서, 이 말은 사실상 ‘현실적인 조언’으로 정착되었던 것이다.


오늘날도 여전히 많은 연애 예능이나 결혼 관련 콘텐츠에서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까?”라는 물음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어 등장한다. 그만큼 이 말은 단순한 격언이 아니라, 인간관계와 외모 가치가 연결된 사회 구조 속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기대와 심리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다.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까?’라는 질문이 자주 ‘맞는 말’처럼 여겨지는 데에는 구조적·심리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먼저, 외모가 사회적 자산으로 작동하는 구조 속에서 이 말은 일정한 설득력을 가진다. 잘생긴 사람은 직장, 인간관계, 심지어 법적 판단에서도 더 유리한 대우를 받는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심리학자 대니얼 하머메시(Daniel Hamermesh)는 ‘외모 프리미엄’이라는 개념을 통해, 외모가 노동 시장에서 임금이나 승진에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잘생긴 사람은 평균적으로 더 높은 소득을 얻고, 사회적 관계에서도 긍정적 피드백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이는 전반적인 삶의 만족도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런 구조는 곧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삶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만들어낸다.


특히 결혼 초기, 즉 인생의 초반에 해당하는 시기에는 외모가 상대에 대한 애정과 만족도에 강력한 영향을 준다. 초기 5년 이내 부부 만족도를 분석한 여러 연구들은 외모 매력이 클수록 결혼 만족도가 높은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미국 심리학회(APA)의 보고서에 따르면, 결혼 3년 차까지는 외모가 결혼 만족도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효과는 점차 줄어든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결혼 전반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모보다는 가치관, 경제력, 정서적 안정성, 갈등 해결 능력 등이 결혼 만족도의 핵심 요인으로 부상한다. 하버드대의 성인 발달 연구(Grant Study)에서도 장기 결혼의 행복 요인으로 ‘서로에 대한 정서적 지지’가 가장 중요하게 나타났다. 잘생긴 배우자와 결혼했더라도 갈등을 회피하거나 정서적으로 무관심한 경우, 만족도는 급격히 하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모가 장기적인 행복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이 말의 유효성은 시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성별에 따른 차이도 뚜렷하다. 남성은 외모에 대한 선호가 평균적으로 더 강하고, 실제 결혼 만족도에도 이를 반영하는 비율이 높다. 반면 여성은 경제적 안정성과 정서적 신뢰를 더 중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외모만으로는 지속적인 만족을 보장받기 어렵다. 이러한 차이는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하다’는 말이 남성에게는 상대적으로 높은 확률로 작동할 수 있지만, 여성에게는 초반 이후 유효성이 급격히 약화된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 말이 통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생길 수 있는 오용도 문제다. 외모 중심의 판단은 상대를 상품화하거나, 내면적 자질을 간과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더 나아가 외모가 뛰어나지 않은 사람에게 부당한 낙인을 남기거나, 결혼 실패의 책임을 외모에 전가하는 인과 착시를 불러올 수도 있다. ‘잘생기기만 하면 괜찮다’는 환상은 정서적 학대나 무관심조차 용인하게 만드는 왜곡된 인식을 조장할 수 있다.


결국 ‘잘생긴 사람과 결혼하면 행복할까?’라는 말은 결혼 초반에는 약 65~75%의 확률로 일정 수준의 행복감을 유발할 수 있지만, 10년 이상 지속되는 장기 결혼에서는 30~40% 이하로 급격히 하락하는 조건부 유효성을 가진다. 외모는 초기 만족도의 주요 요인이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인생 후반부의 정서적 안정을 보장하지 않는다. 잘생긴 사람과의 결혼은 초반 만족감을 줄 수 있지만, 장기적인 행복은 결국 성격과 태도, 관계의 질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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