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팀 회의. 나는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회복지사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나는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 주 사례회의에서 김○○ 어르신 건 어떻게 할까요?" "장기요양등급 재신청 해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주 돌봄자가 있나요?"
모든 대화가 사회복지 전문용어로 이루어졌다. 나는 마치 외국어를 듣는 것 같았다. 병원에서 쓰던 의학용어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정은씨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나에게 질문이 왔다. 나는 당황했다. 무엇에 대한 의견을 묻는 건지도 잘 모르겠고, 어떤 답변을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음... 건강 상태는 어떻게 되나요?"
겨우 이런 질문을 던졌다. 팀장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간호사 관점에서의 의견이 필요해요. 앞으로 적극적으로 의견 나눠주세요."
하지만 나는 여전히 뭘 어떻게 의견을 나눠야 할지 몰랐다.
복지관에서 일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때, 나는 심각한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병원에서는 간호사로서의 역할이 명확했다. 의사의 처방에 따라 투약하고, 환자의 상태를 관찰하고, 필요한 간호중재를 제공하는 것. 하지만 복지관에서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간호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건강관리실에 오는 어르신들은 대부분 혈압이나 혈당을 측정하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나는 직접 측정해드릴 수 없었다. 그럼 내가 여기서 뭘 하는 사람인가? 단순히 기계 사용법만 알려드리는 사람인가?
어느 날, 한 할머니가 건강관리실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선생님, 우리 손자가 열이 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나는 즉각적으로 답변했다.
"해열제 드시고, 미지근한 물로 몸을 닦아주시고, 충분히 수분 섭취하시게 하세요. 그리고 38.5도 이상이면 응급실 가세요."
할머니는 고마워하셨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가진 의료 지식과 경험이 이곳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한계도 느꼈다. 할머니가 손자를 키우게 된 사연, 경제적 상황, 가족관계 등에 대해서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몰랐다. 이런 부분은 사회복지사가 훨씬 잘 아는 영역이었다.
복지관에서 일한 지 3개월이 되었을 때, 나는 깊은 정체성 혼란에 빠졌다. 나는 간호사인가, 사회복지사인가? 아니면 둘 다 아닌 어정쩡한 존재인가?
사회복지사들은 나를 '간호사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정작 간호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사회복지사만큼 복지 업무에 능숙하지도 못했다.
어느 날 팀 회의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정은씨, 이번에 새로 들어오신 어르신 가정방문 같이 가실 수 있으세요?"
"네, 가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서 뭘 해야 하나요?"
팀장님이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음... 건강 상태 확인하시고, 필요하면 연계 방향 의견 주시면 됩니다."
막연했다. 건강 상태 확인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박○○ 할머니 댁 방문. 80세, 독거, 당뇨와 고혈압이 있으시다는 기본 정보만 가지고 갔다.
할머니 댁에 도착하니 작은 원룸에서 혼자 사시고 계셨다.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먼저 인사를 나누고 상황을 파악했다.
"할머니,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아이고, 그냥 그렇게 지내지 뭐. 다리가 아프긴 한데..." "병원은 다니고 계세요?" "돈이 없어서 못 가고 있어."
이때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나를 보며 말했다.
"간호사 선생님이 건강 상태 봐주실 거예요."
나는 할머니께 다가가 혈압을 측정했다. 180/100mmHg. 상당히 높았다.
"할머니, 혈압이 많이 높으세요. 약 드시고 계세요?" "약이 떨어져서 못 먹고 있어." "언제부터 약을 안 드셨어요?" "한... 보름 정도?"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고혈압약을 갑자기 끊으면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병원이라면 즉시 의사에게 보고하고 처방을 받겠지만, 여기서는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말했다.
"의료급여 대상자시니까 병원비 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모르고 계셨나 봐요. 내일 보건소 연계해서 약 받을 수 있게 도와드릴게요."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여기서는 의료적 문제도 사회적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할머니의 고혈압은 단순히 질병이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 정보 부족, 사회적 고립과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문제였다.
그날 가정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여기서 정말 필요한 사람일까?"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내 마음을 알아챈 듯 말했다.
"정은씨가 오늘 혈압 체크해주시고 설명해주신 거, 정말 도움이 됐어요. 저는 180이라는 숫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몰랐거든요."
"하지만 제가 직접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오늘 할머니가 정은씨 설명 듣고 표정이 많이 안정됐어요. 의료진이 아닌 분께 건강 상담을 받으니까 더 편해하시는 것 같았어요."
그때 깨달았다. 나의 역할은 의료진도 아니고 순수한 사회복지사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복지관에서 일한 지 6개월이 지나자, 나는 점차 나만의 역할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나에게 건강 관련 상담을 많이 하셨다. 병원 가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그냥 두기는 걱정되는 그런 중간 단계의 고민들이었다.
"선생님, 요즘 가슴이 답답한데 괜찮을까요?" "혈압약을 깜빡하고 하루 안 먹었는데 괜찮나요?" "당뇨 있는 사람이 감기약 먹어도 되나요?"
이런 질문들에 답변하면서 나는 점차 자신감을 찾아갔다. 그리고 사회복지사들도 내게 의료 관련 자문을 구하기 시작했다.
"정은씨, 이 어르신이 이런 약을 드시는데 어떤 질병인 것 같아요?" "응급상황인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하나요?" "치매 어르신 돌보는 가족들한테 어떤 교육을 해주면 좋을까요?"
나는 병원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답변했고, 사회복지사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팀 회의에서 어려운 사례가 올라왔다.
김○○ 할아버지(85세). 당뇨, 고혈압, 치매 초기 진단. 독거. 최근 몇 번 쓰러져서 119로 병원에 실려 간 적이 있음. 퇴원 후 관리 방안이 필요한 상황.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먼저 상황을 정리했다.
"경제적으로는 기초생활수급자시고, 가족 관계는 아들 한 명 있는데 연락이 잘 안 되세요. 장기요양등급 신청도 해야 할 것 같고..."
나는 의료적 관점에서 의견을 보탰다.
"당뇨가 있으신 분이 자주 쓰러지신다면 혈당조절이 잘 안 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치매 초기라면 약 복용도 규칙적으로 안 하실 수 있고요. 우선 혈당 상태 파악이 필요할 것 같아요."
팀장님이 말했다.
"그럼 정은씨가 먼저 가정방문해서 건강 상태 확인하시고, 그 결과 바탕으로 연계 방향 정하면 어떨까요?"
그때 처음으로 나는 복지관에서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간호사의 관찰력과 사회복지적 시각이 만나는 지점에서.
첫 6개월은 혼란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간호사도 사회복지사도 아닌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현장에 꼭 필요한 역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복지관으로 온 것은 단순한 직장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전문가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팀의 서브"가 아니었다. 나는 이 팀에서만 할 수 있는 고유한 역할을 가진 전문가였다.
� 다음 회 예고 이순옥 할머니와의 만남을 통해 발견한 전문적 관찰력의 힘. 방문간호에서 뇌졸중 전조증상을 발견해 할머니의 생명을 구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나요?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댓글로 나눠주세요.
・이 이야기는 매일연재됩니다
《나는 이름 없는 일을 합니다》는 병원 밖 삶을 고민하며
간호와 복지 사이에서 새로운 길을 만들어온 실천자의 기록입니다.
・일상 이야기와 활동 후기는 블로그에 종종 남기고 있어요
https://blog.naver.com/ju8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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