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시점
4. 초록사과의 향 (그의 시점)
내가 그녀가 보는 그 남자인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은 반대편의 역할에 몰입하는 것이다.
역할에 몰입한다는 것은 그녀와 나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일이다. 입증할 수 있다 —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거짓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은 허구다. 그녀는 그런 것들을 사랑한다. 그녀는 그 허구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걸까.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걸까.
그녀의 대답은 ‘예스’였다.
그녀는 놀라운 이야기꾼이다. 아이디어뱅크이자, 때로는 협잡꾼이며, 교묘한 책략가이기도 하다. 때로는 대담하고, 때로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펼친다.
그녀는 침대 아래에서 낡은 다이어리 한 권을 꺼냈다. 두꺼운 소가죽 표지였다. 모서리 네 면은 닳아 있었고, 속지들이 덧붙여져 다이어리는 배가 불룩하게 부풀어 있었다. 옆으로는 삐죽하게 종이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정리가 되지 않은 묵직한 다이어리였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녀는 생긋 웃으며 침대에 앉았다. 다리를 벌린 채, 그 사이에 다이어리를 내려놓았다. 그 미소에는 또 다른 교략의 기미가 있다.
“오늘 아침에 길을 걷는데, 전철역 앞에 이 다이어리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이렇게 크고 눈에 띄는 다이어리라니.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도 없었죠. 물론 찾아줄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그때 마침 전철 소리가 들리길래, 어쩔 수 없이 들고 뛰었죠. 그러다 전철 안에서 자리가 나길래 앉았어요. 오늘은 읽을 책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살짝 펼쳐봤어요. 생각보다 더 궁금해지더라구요. 당신도 와서 봐요. 궁금할 수밖에 없게 생겼잖아요.”
그녀는 다시 다이어리를 펼치며 그 부분을 나에게 보여주려 했다. 내가 그녀 옆으로 다가갔을 때, 빽빽하게 적힌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짜와 함께 무언가가 기록된 글이었다. 나는 다이어리를 한 장씩 넘겼다. 매일매일의 일기가 꼼꼼히 적혀 있었다. 그녀는 정말 ‘너무 궁금해서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주인이 지금쯤 찾고 있지 않겠어?”
이 정도 분량이라면 주인이 찾고 있음이 분명했다.
“알고 있어요.”
그녀는 다이어리를 뒤적이다가 한 페이지를 폈다. 그리고 다이어리 안에 꽂힌 명함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 명함은, 다이어리의 주인으로 보이는 한 남자의 것이었다.
“일기인가 보지?”
내가 말하자, 그녀는 내 손에서 다이어리를 낚아채고 다이어리를 닫았다.
“신경 쓰지 마요.”
그녀는 다이어리를 가방에 넣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자신의 옆자리를 손끝으로 몇 번 두드리며 나에게 눈짓을 보냈다.
초록 사과의 향이 났다. 갑자기 입안이 마르듯 갈증이 일었다. 한입 베어 물고 싶은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었다. 나는 피우려던 담배를 내려놓고, 그녀 옆에 누웠다. 연녹색 향기가 천천히 내 몸에 진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