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성과 해리
6. 정체성의 연극화 (인성과 해리)
우린 얼마나 많은 배역을 가지고 연기하는 걸까. 많은 사람들, 부딪히는 관계, 그 속의 다양한 배역들.
그녀, 해리가 지금 내 곁에 누워 있다. 그녀는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재잘거린다.
“당신이 볼 땐 난 어린 꼬마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간다면, 그리고 저 길을 따라 걸어간다면, 혼자 술을 마시고 거리를 걷는 술 취한 여인이 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깨끗이 씻고 가운을 걸친 채 쇼파에 앉아 있을 거예요. 따뜻한 핫초코도 테이블에 올려놓고요. 그렇게 집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겠죠.”
그녀가 잠깐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보고 있는 그를 쳐다본다. 그리고 잠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누구일까요? 아내일까요? 낯선 여인일까요? 그녀가 누구죠? 남편이 보는 아내가 그녀의 진짜 모습이 맞을까요?"
순간, 그는 그녀와 함께 생각에 빠졌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타인의 의견을 듣기 위해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들어줄 사람이 필요할 뿐이다.
"난 잘 모르겠어요. 이것도, 저것도 전부 그녀잖아요. 그녀가 결정하기 전까지, 당신이 보는 건 어느 것도 진정한 그녀가 아니에요.”
그녀는 뚫어져라 바라보던 천장에서 고정된 시선을 풀었다. 그리고 서둘러 몸을 그에게로 돌리더니 그를 바라봤다.
“당신이 보는 그녀는 누구죠?”
그녀의 가녀린 하얀 손이 그의 얼굴을 매만진다. 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기도 한다.
“당신은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걸까요? 당신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떨까요? 지금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걸까요? 진짜 나를 보고 있는 걸까요?”
“물론이야.”
“그렇다면 당신은 나를 알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 감정까지도 전부 읽고 있겠죠.”
그녀가 그의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리고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놓인 의자에 앉는다. 그녀가 그를 쳐다본다.
'그녀의 눈빛은 내 어떤 것에 몰입해 있는 걸까.'
그녀는 그의 손에 들린 담배의 연기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담배를 입에 문다.
“만약 내가 바라보는 네가, 네가 생각하는 모습이 아닐 땐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알아챌 수 있는 뭔가 다른 게 있나?”
그녀는 코를 찡긋거렸다. 그런 질문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처럼.
“그렇다면 빨리 찾아야 될 거예요. 왜냐면, 수를 쓰고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수?”
그녀는 새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계산을 하고 있는 거죠. 새로운 계략을 꾸미는 중일거예요.”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추더니,
“아, 어쩌면 절망할 수도 있겠죠.”
“그녀가?”
“아니, 당신이죠. 왜냐면 그녀의 계산은 정확할 테니까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영리할 거예요. 계략은 교묘하고 섬세하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거예요. 아마 그녀라면 그럴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가 집중하듯 몸을 일으켜 그녀 가까이로 다가갔다. 그녀는 그가 앉아 있는 침대 옆에 발을 얹고 그의 담배를 훔쳤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이 상황이 전부 어색해져버릴거에요.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할 거예요.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벌써 지루해졌으니까요. 그녀는 분명, 당신과 있는 이 상황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할 거예요. 벌써 당신이 지루해지기 시작한 게 분명해요.”
그는 괜히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표현하지 않았다. 지금 이 타이밍에 불쾌감을 드러내는 건 어리석고 속좁아 보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런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을 한 번 감고, 눈썹을 한 번 치켜올려 본다.
“무슨 계략이지?”
“음…”
그녀는 잠깐 숨표를 찍듯 담배 연기를 내뱉고서 대답한다.
“새로 태어날 수도 있겠죠.”
그는 헛웃음을 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사실, 뭔가 그럴싸한 대답을 원했다. 그는 방금까지 대화가 불쾌했다. 게다가 진지하기까지 했다면, 먼저 일어나버릴 생각도 하고 있었다.
그는 안도감을 느꼈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왜냐면 그녀는 새로운 것을 갖게 될 테니까요. 육체, 정신, 생각, 그 모든 새로운 것들을 갈망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그런 게 가능하다면 좋겠군. 나도 새로운 삶을 원해. 영원히 원하겠지.”
그는 비꼬는 듯한 말투를 내뱉었다. 헛웃음이 계속 새어 나왔다. 그렇지만 그녀를 기분 나쁘게 할 의도는 없었다. 오히려 그런 그녀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비꼬는 거예요? 이건 가능한 일이에요. 정확한 사실이라구요.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거예요.”
그녀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가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표정을 다시 한 번 쳐다보고는 말한다.
“당신은 제 생각을 얕잡아보고 있네요. 그럼 저랑 내기할래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소리 내어 웃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는 손바닥을 한 번 치고,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난다.
“난 좀 씻어야겠어.”
그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그녀가 다리를 쭉 뻗어 그의 다리를 발로 감쌌다.
“어떻게 생각해요? 난 증명해 보일 수 있는데.”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단 말이지? 이런 대화엔 애초에 답이 없어. 난 추상적인 대화는 좋아하지 않아.”
“난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에요. 당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해요.”
그녀는 그에게 더 바싹 다가섰다.
“흥미로울 거예요.”
“어떤 면에서?”
사실 그는 그녀가 하는 말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 듣지도 않았다. 진부하고, 지루하다는 단어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을 거르지 않고 전부 쏟아내는 것처럼, 그녀의 말은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있다 생각했다.
“내 심장을 당신에게 줄게요.”
그는 잠깐 이상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데, 우리가 지금 무슨 대화를 하는지 설명 좀 해주겠어?”
“전부 이해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가져가기만 하면 돼요.”
그녀가 그의 손을 가져다 자신의 가슴에 올렸다.
“대신 반드시 가져갈 수 있어야 해요.”
‘이게 대체 무슨 대화이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단지 하룻밤, 잠깐 만나 잠을 잤을 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미친 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그제야 집중하는 그를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나를 찾는 거예요. 내가 여전히 존재하는지, 찾아보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지?”
“생각보다 쉬울 거예요. 그녀의 계략은 복잡하지만, 사실 아주 교묘한 거예요. 그 트릭은 아주 간단해요. 그녀는 단지 그대로를 따라갈 뿐이에요. 결코 뒤돌아보지 않으면서. 그게 그녀의 존재가 가능한 이유죠. 당신은 찾아내기만 하면 돼요. 그게 다예요. 그러면 그녀의 심장을 가질 수 있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실소했다. 그냥 그녀의 말을 믿지도, 이해하지도,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도, 더욱이 어이없어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주저리 내뱉고, 주저리 담으면 그만이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농담과 웃음소리, 그리고 원할 때 필요로 하는 것만 있으면 해결된다.
그녀는 분명, 그가 자신의 말을 무신경하게 지나쳤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그가 지금 그녀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도 알고 있다. 그녀는 미소를 지었고,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싼다. 그는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끌어당긴다. 그리고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길고 하얀 목덜미에 키스를 한다.
그런데,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게임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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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소개]
이 작품은 인간 내면의 다중성과, 사랑 속에서 일어나는 자아의 분열과 통합을 다룬 심리소설입니다.
융의 ‘Self–Persona–Shadow’ 개념을 바탕으로, 기억과 망각, 침묵과 거짓 사이에서 존재의 경계를 오가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사랑은 나를 하나로 만들어주는가, 아니면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내는가?”
사랑이 존재의 통합을 이루지 못할 때, 인간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복제하고, 그 시선 속에서 새로운 자아로 다시 태어나려 합니다.
이 소설은 사랑과 정체성을 실험하는 심리소설이자, 복제된 자아의 시대를 사유하는 실존적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