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과 끝 -4
새벽이 올 무렵 소파에 기댄 채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테이블에는 맥주캔과 넷플렉스를 보며 먹은 음식 접시가 그대로 놓여있었다. 어스름 새벽의 고요함 속에 투닥이던 빗방울 소리가 티브이 속 드라마 장면과 맞물려 잠에서 깼고 마침 바닷가에서 연인을 바라보던 남자 주인공의 절절한 사랑에 가슴이 아려왔다. 벌써 십 년도 전에 방영했던 드라마를 다시 정주행 하며 나도 저렇게 뜨거운 여름을 가져본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내가 했던 연애는 왜 매번 축축하고 찝찝한 긴 장마 속을 지나던 여름이었는지 괜히 억울한 생각이 들어 울컥하기도 했다.
내가 널 가지려고 내 인생에서 뭘 내던졌는지 넌 몰라.
남자 주인공의 대사를 읊조리며 미지근했던 나의 여름이 어느새 가을의 문턱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체감했다.
누구나 여름이라는 계절을 지나지만 그 여름이 모두 뜨겁고 강렬할 필요는 없음을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 젊은 날의 기억이 긴 장마 속에 잠겨 허우적 되지 않기를 그저 바라왔을 뿐이었다.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긴 장마가 그치면 다시 매미가 쉴 새 없이 울어대던 뙤약볕 강렬한 여름날의 풍경을 맞이할 수 있을까?
테이블 위에 있던 접시를 정리해서 싱크대볼에 넣고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둡고 고요한 방 안에서 점차 시야가 밝아지고 자세를 고쳐 눕자 내 방안의 풍경들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 난 언제나 혼자였지.
그제야 스르륵 눈이 감겼다.
원치 않던 그리움에 내 마음이 아파와.
커튼을 뚫고 뿜어져 오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침부터 누구야?"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자 벌써 정오가 넘어가고 있었다. 휴대폰 창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었고 나는 당연하게 종료버튼을 누르고 다시 그것을 협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다시 한번 휴대폰이 울렸고 창에는 조금 전 보았던 그 번호가 찍혀있었다. 누구지? 나는 호기심에 통화버튼을 눌렀다.
"혹시 서은 씨 휴대폰인가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저는 서은 씨 어머님 소개로 연락드린 오창윤이라고 합니다."
"네, 저도 엄마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그런데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누구를 소개받을 생각이 없어요. 죄송합니다."
"혹시 애인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단지, 이렇게 누군가를 만나는 게 부담스러워요."
"네, 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만 우리 가볍게 만나서 결혼에 관해 이야기해 보는 건 어떨까요?"
그 남자의 말투에는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가 묻어있었다.
"엄마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말해주세요."
솔직히 그 사람에게 부탁을 해 볼 요량이었다. 우리의 관계가 더 이상 진전되지 않는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닌 그 사람의 뜻이라는 것을 엄마에게 어필해 주길 바랐다. 그런데 가볍게 만나자는 말과 함께 이어진 결혼이라는 무거운 단어가 주는 괴리감 속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만남을 선택하게 되었다.
만나서 부탁해 보자.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보다는 조금의 불안함이었다.
내 부탁을 거절하면 어떡하지 하는 것도 있었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나의 평온했던 일상에 변화가 생기거나 내 자존심에 어떤 날카로운 스크레치가 생기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그래서 약속도 금요일이나 주말이 아닌 수요일을 선택했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빠져나올 수 있는 구실을 마련하기에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회사 여자 화장실 안에서 화장을 고쳤다. 아침에 입고 나온 스카프 블라우스가 어색하게 느껴져서 화장을 하다 말고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었다. 그러자 언제 곁에 있었는지 수찬이 얼굴을 쓱 내밀었다.
"뭔 일?"
"선 보러 가는 길이다."
"오, 진짜? 그런데 옷을 그렇게 입고 왔다고? 안돼, 너무 칙칙해."
수찬은 나에게 자신의 립스틱을 내밀었다. 그것은 강렬하고 매혹적인 레드색의 립스틱이었다.
"너무 과해. 이런 색은 너에게나 어울린다고."
내 말을 듣는지 마는지 수찬은 기어이 내 입술에 자신의 빨간 립스틱을 발라주었고 어깨에 살짝 넘겨놓은 머리카락을 정리해서 자신의 헤어핀으로 고정시켜 주었다.
"넌 어깨가 참 예뻐. 잘 다녀와. 갔다 와서 언니에게 보고하는 거 잊지 말고."
나는 만남을 시작하기도 전에 끝을 생각했다. 사랑을 그리워했지만 매번 그것의 끝은 처참했거나 미지근했다. 그러기에 이미 내 사랑은 가을의 문턱을 지나고 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거리에는 온통 커플들로 가득했다. 누군가에게 눈길이 가면 꼭 그 사람 곁에는 그의 연인이 있었다.
나에게 사랑은 늘 고통스럽거나 괴롭거나 시시하거나 하는 즐겁지 못한 놀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