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계절 -3
"내일 주말인데 오늘 맥주 한잔 어때?"
퇴근 시간만 카운트하고 있는데 수찬이 다가와서 내 어깨를 살며시 두드렸다.
"아니, 주말은 나만의 계절이야. 건드리지 마. 집에 갈 거야."
수찬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아무것도 할 것 없는 너의 주말은 도대체 무슨 계절이니?"
금요일 저녁은 내가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주말과 더불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갖는 것, 그것은 오래된 나의 루틴이었다. 그 시간은 나에게 마치 늦가을과도 같은 계절이었다.
괜히 센티한 기분을 마음껏 느낄 수 있는 회복의 시간이자 내가 또 하루를 견디는 보상의 시간이기도 했다.
"나는 집에만 있으면 두통이 생기더라. 이 과장한테 가서 맥주 한잔 사달라고 해야겠다."
"단 둘이? 진우 씨는?"
"몰라, 머리 아프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더는 나를 잡지 않고 빠르게 포기해 버리는 수찬은 어느새 내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 역시 가방을 챙겨 들고 나만의 공간으로 가기 위해 서두르기 시작했다.
금요일 저녁 퇴근길의 풍경은 유난히 아름답다.
얕게 깔리기 시작한 어둠의 농도도, 그에 걸맞게 하나 둘 켜지는 조명의 반짝임도, 이 날만큼은 여유가 느껴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서도 유난히 그 시간은 다른 날의 시간과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나 역시 오로지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내 공간으로 향하는 기분과 이곳의 분위기는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매일 같은 지하철을 타고 매일 같은 거리를 걷고 매일 아무도 없는 집에 불을 켜면서도 내 기분은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런 내가 제일 먼저 하는 일은 샤워를 하고 집 안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아침에 아무렇게 벗어둔 옷을 모아서 세탁기에 넣고 싱크대 볼에 들어있는 컵과 접시 몇 개를 씻어서 물기까지 완벽하게 제거했다. 침대 옆 협탁 위에 쌓아둔 책들을 읽을 책과 읽은 책으로 분류해서 정리해 두고 건조기 속에 넣어둔 수건을 꺼내 개어서 정리하고 조금씩 흐트러져 있던 소품들을 내가 좋아하는 각도로 조금씩 맞춰놓고 나면 비로소 나만의 계절로 풍덩 뛰어들 준비가 끝나는 것이다.
미리 주문해 둔 케이준 치킨 샐러드와 매콤한 낙지소면, 비스킷 몇 개를 접시에 담고 살얼음 차가운 맥주 한 캔을 들고 테이블 위에 세팅하고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리고 넷플릭스로 그동안 밀린 드라마나 영화를 밤새 보고 있으면 새벽이 오는지, 아침이 오는지 모르는 시간들이 나를 센티하게도, 슬프게도, 나른하게도 만들었다.
남들이 보면 시답잖은 일들을 하며 아무런 의미 없는 시간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그 시간은 온전한 나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는 시간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 시간과 나만의 계절만 있다면 그 어떤 일에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다.
"혹시 서은 씨 휴대폰인가요?"
월요일 아침,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마치 정돈되지 못한 하루를 맞이 한 듯 몸은 물에 젖은 솜마냥 무거웠다. 발을 한 발 내딛을 때마다 힘이 빠져서 벽이나 문을 잡지 않고서는 움직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출근 준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기까지는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원래 타야 하는 지하철 시간을 한 번 놓치고 다음 시간에도 겨우 아슬아슬하게 탈 수 있었다.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의 비좁음은 나를 더 지치게 만들었고 사람들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는 내 몸짓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아 신경이 곤두섰다. 한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반복하며 출입문 옆의 의자에 겨우 앉아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오늘과 같은 월요일의 출근길은 꽤 오랜만이라 적응이 되지 않았고 그 치열함 속에 치여 사무실 의자에 앉고 나면 곧이어 모두가 회의실에 모여 이번 주에 있을 사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야 했다.
어느새 표정 관리가 되지 않을 만큼 영혼까지 털려버린 나는 상쾌한 공기를 마셔야 살 것 같아 회사 옥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흡연을 하며 본인의 이야기나, 주말 동안의 이야기, 또 다른 사안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느라 분주했다.
나는 옥상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자판기에서 꺼낸 율무차를 홀짝 거렸다.
"써언"
수찬이었다. 수찬은 매번 나를 써언이라고 불렀지만 오늘따라 건수를 잡은 맹수처럼 신이 난 그 목소리는 유난히 우렁차서 부담스러웠다.
"너만의 계절을 느끼고 온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늘 써언의 몰골은 말이 아닌데? 언니 눈은 못 속여? 나 몰래 딴 데 갔다가 왔지? 뭔 일?"
역시 수찬의 눈썰미는 알아줘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말은 나에게 회복과 많은 날들에 대한 보상 같은 시간이라 그것을 뺏기지 않는 한 이렇게 힘든 월요일은 좀처럼 내게는 없는 일이었다.
"그 사람에게 연락이 왔어."
"누구?"
"엄마가 선 보라는..."
"그런데? 만났어?"
"아니, 만나지도 않았는데 대뜸 결혼에 관해 이야기해 보자는 거야."
풉,
수찬이 실소를 터트리더니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기 시작했다. 급기야 내 어깨를 툭툭 치기 시작했고 과해지는 제스처와 점점 커져가는 웃음소리에 모든 시선이 우리를 향해 집중이 되는 것 같아 민망해 죽을 것 같았다.
"스잔? 마이 스잔 왜 그래?"
역시 담배를 피우던 김 부장이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김 부장은 수찬을 항상 스잔이라고 불렀는데 자신이 소싯적에 동경하던 김승진의 노래 스잔 속 여주인공이 수찬이 아닐까 생각했었다는 개소리를 시전 하고는 했었다.
"부장님,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대뜸 결혼하자고 한다면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거예요?"
내게 아무런 동의도 없이 수찬은 주어 없는 궁금증을 아무렇지도 않게 김 부장에게 내뱉고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남자가? 설마 우리 스잔이야기는 아닐 테고, 여자가 얼굴이 엄청 이쁘대? 돈이 어마어마하게 많대? 어디 별 미친놈 하나 걸렸구먼. 조심하라고 해. 그러다 인생 조진다."
아무렇지 않은 값싼 말을 내뱉고 김 부장은 음흉한 미소로 수찬에게 살짝 윙크를 한 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수찬은 몸을 부르르 떨며 "윽, 더러워."라는 말을 조그맣게 읊조렸다. 그리고는 나에게 두 손을 양 옆으로 하고 어깨를 살짝 올리는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모르긴 몰라도 희한한 놈인 건 확실해. 쨌든 잘 생각해 보고 한번 만나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무슨 뜻인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좀 흥미롭다. 내가 너라면 한번 만나볼 것 같아."
수찬이 가고 와글와글 시끄럽던 내 주변은 점차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지난 토요일의 일을 떠올렸다.
온전히 나만의 계절이 되길 바랐던 그 시간 속 균열을 일으킨 전화 한 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