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고 싶지 않아 -2
띠띠띡, 띠리릭.
현관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함께 집 안으로 들어온 건 엄마였다.
이른 시간부터 분명 무슨 급한 용건이 있어서 우리 집으로 왔을 엄마이지만 (직감적으로 내가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할 거라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꿈속에서 본 아일랜드 식탁 옆에 쓰러져 있던 엄마와는 달리 건강한 모습의 엄마를 보자 왠지 안쓰러워서 더 반갑게 느껴졌다.
"김여사, 아침 댓바람부터 또 무슨 일이실까?"
나는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며 엄마의 반응을 살폈다. 엄마는 역시나 욕실에서 막 나온 나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또 지금까지 욕실 안에 죽치고 있다가 이제야 나온 거지? 네가 가진 트라우만가 뭔가에 일정 부분 내 책임도 있는 것 같아서 내가 딱히 할 말은 없다만 이제 아빠도 돌아가시고 없는 마당에 안 그래도 되잖아. 그래가지고 결혼은 어찌하려고 그러는 거야? 응?"
역시...
"나, 출근 준비 해야 해. 늦었어."
나는 엄마의 눈길을 피해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는 하얀 이불과 베개가 아무렇게나 구겨져 흐트러져 있었다. 엄마가 방으로 따라 들어오기 전에 젖은 이불 시트와 베개 커버를 꺼내 둘둘 말아 안고 나와서 세탁기 안에 집어넣었다.
"이불 하고 베개커버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말아서 집어넣고 너 그냥 세탁버튼 누르지? 그래서 제대로 빨래가 되던? 이렇게 제대로 접어서 넣어야 빨래가 깨끗하게 되는 거라고. 그래가지고 진짜 시집은 어찌 가려고 그러니?"
또, 또 결혼얘기다. 언제부턴가 엄마의 모든 이야기에는 결혼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엄마, 나 지금 늦었다고."
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리고 드라이로 젖은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이제 엄마는 냉장고를 열어 검사까지 하는지 경쾌하게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났고 머리를 말리면서도 온 신경은 그곳에 머물며 영 거슬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헤어수건을 오래 하고 있었는지 도통 본디 내 가르마로 길이 나지 않았고 꾸불꾸불 뻗은 앞머리도 엉망이었다. 나는 일단 큰 헤어롤을 앞머리에 말고 간단히 피부화장을 했다. 그리고 맑은 레드색이 예쁜 립스틱을 입술에 발랐다.
에잇, 모르겠다. 오늘은 내추럴이다.
대충 옷도 편한 검은색 스커트를 꺼내 입고 그 위에 차콜색 재킷을 걸쳤다. 나는 다시 머리를 손질하고 거실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냉장고 속에 있던 반찬그릇들은 모두 식탁 위로 나와있었고 엄마는 냉장고 안을 닦느라 분주했다.
이때다. 지금이 아니면 곱게 밖으로 나가지 못할 거야.
"엄마, 나 갈게. 엄마도 대충 해놓고 집에 가요. 내가 저녁에 퇴근하고 와서 마무리할게."
나는 신발장에서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엄마가 냉장고를 정리하다 말고 빠른 걸음으로 곁으로 다가왔다.
"너는 엄마가 전화하면 만날 바쁘다고 빨리 끊더라. 내가 중요하게 할 말이 있는데 하지를 못하잖아. 이렇게 집에 오지 않으면 너랑 대화할 시간이 없어. 회사일은 너 혼자 하니? 너만 바쁘고 피곤해? 잔말 말고 며칠 있으면 너한테 전화가 올 거야. 그러니까 한번 만나봐. 내가 네 번호 알려줬다."
역시 엄마가 아침 일찍부터 왔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선을 보라는 이야기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엄마는 뭐가 그리 급하고 뭐가 그리 중요한지 출근하는 나를 붙잡고 꼭 전화를 받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나는 반응도 대답도 없이 가방을 어깨에 메고 현관문을 열었다.
"너, 너 스커트에 운동화 신고 가는 거야?"
아, 오늘 하루 일진은 또 망한 듯.
당장이라도 울릴 것 같았던 엄마의 재촉 속 상대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처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당장 누구를 만나고 싶지 않은,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식의 만남은 더더욱 선호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구는 서른이 넘어가면 자연스럽게 누구를 만나고 연애하던 이십 대의 사랑 같은 생각 따위는 버려야 한다고 한다. 이십 대의 만남과 삼십 대의 만남은 또 다르다고. 이미 삼십대가 되고 나면 누구를 쉽게 만나고 헤어질 수 없는 모든 조건이 갖춰져 버렸다나 뭐라나.
삼십 대에는 뭐가 되어도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어제와 오늘이 여전히 똑같음에 절로 힘이 빠지는 요즘이다. 거기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만나는 사람마다 내 선자리를 부탁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치워버려야만 하는 짐짝이 된 것 같아서 더더욱 이런 형식의 만남은 내키지 않았다.
점심을 간단히 샌드위치로 해결하고 회사 근처 보리 공원 벤치에 앉았다.
이런 날은 유난히 하늘이 더 맑고 푸른 걸 보면 하늘도 내 편은 아닌 것 같다. 딱 커피 한 모금을 간절히 생각하고 있는데 어디서부터 내 청승을 보고 있었는지 외근을 나갔다가 온 수찬이가 양손에 커피를 들고 걸어왔다. 얼굴에는 얄궂은 미소를 잔뜩 머금고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너 청승이야. 하는 말을 온몸으로 내뿜으며 수찬은 나에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내밀었다.
"나, 달달한 것 먹고 싶은데."
"그냥 들이부어라."
"넵."
여전히 화려한 수찬의 하얀 팔목에서는 맥박이 뛸 때마다 상큼하고 달콤한 향이 풍겨져 나왔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시자 왠지 커피의 쌉쌀한 향과 맛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뭔 일?"
"엄마가 선 보래. 너무 싫어."
"선이 어때서? 선은 싫고 소개팅은 괜찮고 그런 거야? 소개팅이랑 뭐가 다른데? 선은 결혼이고 소개팅은 연애나 사랑이고 그럴 것 같아? 어차피 다 똑같아. 그냥 가볍게 생각하라고."
역시 쿨한 수찬은 여전히 쿨했다. 가끔은 그런 수찬에게 상처도 받지만 심각한 일에도 큰 타격을 받지 않는 수찬의 그런 성격이 내심 부럽기도 했다.
그런가. 내가 너무 심각한가. 별 것도 아닌 일에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몰래몰래 불어오는 바람도, 수찬과 나란히 앉은 벤치 속 풍경도 나름 나쁜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