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만남 -5
아직 어둠이 채 내려앉기도 전인데 예고에도 없던 빗방울이 한 방울씩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 사람이 알려준 약속장소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걸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익숙한 곳을 지나 곧 내가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신호등을 건너 코너를 지나 쭉 직진하다 보면 나오는 초밥 가게 맞은편 '슴'이라는 카페였다.
열림버튼을 누르기 전 블라우스에 달린 스카프를 정리하고 가방을 고쳐 들었다. 앞머리에는 빗방울인지 땀인지 알 수 없는 물방울이 맺혀 이마에 흘러내렸다. 나는 숨을 고르고 손바닥으로 대충 물기를 닦은 뒤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그곳에는 밝은 화이트 컬러의 벽과 자유로운 모양의 제각기 다른 의자들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경쾌하지만 다소 올드한 팝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리 그 사람이 와 있다면 어디에 앉아있을까, 혹시 그렇지 않다면 내가 앉을 만한 자리는 어딜까 생각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안녕하세요. 오창윤이라고 합니다."
어디에 있었는지 불쑥 나타난 남자는 나에게 자신을 말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우리 어디에 앉을까요?"
그는 자신이 찾던 상대가 나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창가 자리로 이끌었다. 다행히 그 사람이 고른 자리에는 자유분방한 의자들 대신 다소 클래식한 의자가 놓여있었다. 순간 상대에 이끌려 자리에 앉다 보니 이제야 그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떻게 저인줄 아셨어요?"
"얼굴을 알아봤으니까요."
아무리 보아도 나에게는 낯선 얼굴이었다.
"저를 아세요?"
전화 목소리만큼 장난기가 숨은 얼굴에는 앳됨이 있었다. 유난히 얼굴이 작고 그에 비해 눈이 큰데 눈매가 길고 날카로웠다. 짧고 단정한 헤어스타일에 흰색 셔츠와 차콜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네, 조금."
여전히 그 사람은 웃고 있었다. 나는 나를 조금 알고 있다던 이 남자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디서 보았을까. 우리가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러고 보니 길고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그 눈이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다.
"우리가 알던 사인가요?"
"나, 정말 기억 안 나요? 어머님이 뭐라고 아무 말씀 안 하셨어요?"
"네, 아무 말도."
"내 이름 정말 기억 안 나요? 내 이름 오창윤."
"오, 창, 윤?"
나는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연립주택에 살았다.
그 연립주택에는 유독 내 나이 또래의 여자친구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 연립주택 주변으로 고깃집, 슈퍼마켓, 일반 주택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곳에도 또래 친구들이 있었다. 그 아이들은 거의 다른 학교에 다니고 있었지만 학교를 마치거나 주말이 되면 곧잘 모여 놀았다. 우리들의 아지트는 내가 살던 연립주택 102호였다.
102호에 사는 혜연언니는 아빠 없이 엄마와 언니, 오빠와 살고 있었는데 엄마는 일하느라 매일 바빴고 큰언니와 오빠는 너무 커버려서 매번 집이 비어있었다
우리는 그곳에서 게임을 하거나 숨바꼭질을 하거나 각자 숙제를 하며 놀았다. 매번 집에 혼자 있기 무료했던 나는 그 친구들과의 놀이에서 절대 빠지지 않았다.
"윤 서 은! 윤 서 은!"
아이들이 우리 집 앞에서 내 이름을 부르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들에게로 달려갔던 것을 보면 내 어린 시절 그때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그런데 나는 왜 그 시절을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을까.
"나, 윙크받았다."
지현이 나를 보며 바닥에 하트가 그려진 쪽지를 내려놓았다.
"나도 윙크받았다."
보라도 바닥에 쪽지를 내려놓았다.
"나도 윙크받았다."
이번엔 혜연언니였다.
손에 쪽지를 가지고 있던 아이들은 하나둘 바닥에 쪽지를 내려놓고 결국 나와 주희만이 남았다.
나도 윙크를 받기 위해 아이들을 바라보며 눈을 맞췄지만 곧 주희마저 바닥에 쪽지를 내려놓고 말았다.
"서은아, 왕이 누굴까?"
아이들의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혜 연 언니?"
"땡!"
"왕은.."
"오 창 윤이다!"
오창윤? 그래 오창윤. 여자아이들만 있는 무리에 매번 끼어있었던 유일한 남자아이.
그 아이 이름이 오창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