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우리

우리의 인연 -6

by K기노

학교에서 집까지는 족히 사십 분 이상 걸어야 했다.

집 가까이에 학교가 있었지만 왜 매번 멀리까지 학교를 오가며 시간을 낭비해야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침에 늦잠이라도 한번 잔 날이면 무조건 화장실 청소당번 확정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 되지만 매일 아침 꽉꽉 미어터지는 버스지옥을 겪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일찍 나가서 걷는 것을 선택했다. 그것만은 오로지 내 선택이었다. 하지만 코앞에 집을 두고도 매일 늦는 아이들과 함께 화장실 청소를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억울했지만 예외는 없었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날에는 싫음이 더욱 늘어났다. 거기다 체력장이라도 하는 날이면 더욱 곤욕이었다. 하지만 철도길을 따라 걷다 보면 싫음도 잊히는 날이 많았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산의 모습과 자연의 아름다움은 나를 성숙하게 만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중에는 나를 성까지 붙여가며 또박또박 부르던 아이가 있었다.

"윤 서 은! 윤 서 은!"

"왜?"

"같이 가자."

"넌 친구 없어? 왜 만날 나한테 같이 가재. 너는 남자애가 축구 같은 건 안 하니?"

내가 쌀쌀맞게 대해도 늘 웃고 있던 아이. 유독 작은 얼굴에 장난기 넘치는 미소를 가진 아이. 큰 눈을 가졌지만 기다란 눈매가 날카롭던 그 아이는 작은 얼굴만큼 키도 작아서 남들이 보면 내가 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누나쯤으로 보였을 것이다.

"기다려줘."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고르고 그것을 입에 물고 나올 때까지 그 아이는 나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든, 집에서 있었던 일이든, 그리고 그것이 자연에 관한 말이든, 내 입에서 아무렇게나 나오던 말이든 그 아이는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두 번째 계단. 우리는 그 계단을 그렇게 불렀다.

2층이나 3층으로 가는 큰 계단이 있었지만 내가 살던 연립주택에는 폭이 좁은 계단이 하나 더 있었다. 계단이었지만 그 계단으로는 2층으로도 3층으로도 갈 수 없었다. 그저 계단의 형태만 가지고 아무런 쓸모도 없이 덩그러니 있던 그 계단에는 간혹 주민들이 작은 화분을 하나 둘, 놓아두는 용도로만 쓰였다.

두 번째 계단, 다섯 번째 칸.

내 전용 자리였다.

"왜 울어?"

"그냥."

"치, 거짓말. 그냥 우는 게 어딨냐?"

"그냥 울면 안 되냐?"

붉은 해가 넘어갈 때쯤 사방은 빨갛게 물이 들었다. 곧 어둠이 몰려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렇게 뉘엿뉘엿 천천히 물결처럼 흩어져갔다.

"그렇게 싫어할 거면서 결혼은 왜 해?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거 아냐? 사랑이 그렇게 시시해?"

"원래 그렇대. 결혼을 하고 나면 사랑은 다른 형태로 흩어진대. 오직 상대에게만 몰려있던 사랑이 흩어져서 다른 형태로 또 다른 사랑을 만든다잖아."

슬펐다. 화가 났다. 그래서 울었다. 단지 그 이유였다. 단순하게도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 아이 앞에서..





그 사람은 레몬티를, 나는 딥바닐라빈 라테를 주문했다.

"오늘 하루 종일 커피를 마셨어요.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한잔, 점심때 한잔,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마다 한잔씩. 하루에 최소 네, 다섯 잔은 마시는 것 같아요."

향긋한 레몬티를 마시며 그 사람은 여전히 웃었다.

"어떻게 날 기억했어요?"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나의 모습도 궁금했다. 유독 쌀쌀맞고 까칠했던 나라는 아이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 사람은 어떤 생각으로 이 자리에 나왔을지 말이다.

"엄마와 서은 씨 어머님 연락하고 지내는 거 알고 있었어요? 서은 씨 이사 가고 연락이 끊겼다가 우연히 길에서 만나서 다시 연락처 주고받았다는 이야기 들었어요. 아줌마가 서은 씨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결혼할 때가 되었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요."

그 사람 말을 듣자마자 내 얼굴은 빨갛게 타올랐다. 마치 그때의 붉은 해처럼 사방으로 물들었다가 서서히 흩어져갔다.

"우리 엄마 주책이에요. 별 이야기를 다 하고 다니나 봐요."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그 사람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줌마가 서은 씨 걱정을 많이 해요.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생각보다 그 사람과의 대화는 괜찮았다.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과 마주 앉았다면 나는 숨이 막혀서 커피만 마시고 나올 궁리를 했을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은 끊임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중간에 끊겼던 서로의 이야기는 그것만으로도 궁금증을 자아냈다. 여전히 편안했고 웃음도 나왔다.

"우리 동갑인데 그때는 창윤 씨가 너무 작아서 동생 같았던 기억이 나요. 지금 모습 하고는 많이 달랐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의 팔과 다리는 길고 늘씬했다. 그 사람은 긴 손가락으로 잔을 들어 레몬티를 마시며 다소 의아한 표정으로 내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몰랐어요? 내가 서은 씨 보다 한 살 많은 거요. 나는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우리 동갑으로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렇게 작고 동생 같았던 남자아이가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니. 정말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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