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빨간 빛에 스며든 달의 세계 (4)
#4 [푸른 멍 속 붉은 결심]
하빈은 빨간 카드와 머그컵을 손에 쥐고 창가에 앉았다.
햇살이 바닥을 부드럽게 감싸고,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이 그의 마음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붉은 컵 속 커피는 그의 마음처럼 은은하게 일렁였다.
빨간빛이 번지는 액체 위로 햇살이 반짝이며, 그의 결심을 축하하듯 미세하게 춤췄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뭘까?”
“내 삶은 내가 만드는 건데…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네. 그저 떠밀리듯 살아왔어. 이게 과연 삶이었을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친구들과 어른들에게 외면받고, 20살부터 시작한 직장생활에서 치이며 살아온 날들이 떠올랐다.
늘 남의 기대와 시선 속에서 자신의 색을 잃었던 시간들.
자신이 만든 세상이 아닌, 타인이 만든 세상 속에서 허둥지둥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하빈은 빨간 컵을 한참 바라보았다.
커피 속 잔잔히 일렁이는 빛처럼, 변화는 바깥에서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서서히 피어나는 것임을 느꼈다.
스스로 선택하고 손끝으로 그 흐름을 따라갈 때, 삶은 조금씩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색으로 스며드는 법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그는 컵을 꼭 쥐고 속삭였다.
“나는 과거의 상처와 실패도 내 일부임을 인정할 거야.
그리고 스스로를 아끼며, 내 삶을 내가 그리면서 채워나갈 거야.”
하빈의 마음 한켠에는 여전히 푸른 멍이 스며들어 있었다.
생일, 운동회, 입학식, 졸업식… 축하받아야 할 순간마다 그는 늘 혼자였다.
그 공허함은 속삭였지만, 마음은 은은하게 끓어올랐다.
하빈은 무언가 깨달은 듯,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잊고 있던 진실이, 오늘 하루의 끝에서 비로소 다시 떠오른 듯했다.
“나는 나를 믿고, 내 삶의 중심에서 홀로 걸어갈 수 있다는 걸 알아.”
“하지만 온 마음이 기쁨으로 부풀어 오를 때면, 혼자인 나는 그 기쁨 속에서조차 사무치게 외로움을 느꼈어.“
“손끝에 닿을 듯한 행복이 눈앞에서 흘러가고, 나눌 수 없는 환희가 내 마음을 텅 빈 바다처럼 잠식해왔어…….“
기쁨이 가득한 날에도 혼자인 하빈의 마음은, 슬픔보다 더 사무치게 외로웠다.
웃음과 밝음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 고독이, 그를 조용히 감쌌다.
“사랑하는 사람의 슬픔조차 내가 받아줄 수 있다면…
그 무거움마저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슬픔은 하빈 혼자 안아도 견딜 만했다. 그러나 기쁨이 몰려오는 날, 그 빛을 함께 바라볼 사람이 없다는 고독이 마음을 사무치게 스쳤다.
마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슬픔만큼,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기쁨도 깊은 바다 속에 묻혀 있는 것처럼.
‘내가 타인의 슬픔을 받아줄 테니, 내 기쁨도 함께해도 되지 않을까…‘하며,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그 순간, 카페 구석에서 조용히 그를 지켜보던 여인은
엉켜 있는 빨간 뜨개실을 그의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어디론가 잠시 사라졌다.
하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빨간 뜨개실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은 가느다란 실이 묘하게 따뜻했고, 알 수 없는 힘으로 마음을 끌어당겼다.
“이 실… 마치 내가 풀어나가야 할 길 같아.”
붉은 빛이 품고 있는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하빈은 잠시 숨을 죽인 채 그 길 위에 서 있는 자신을 상상했다.
한 올 한 올 따라가다 보면, 기쁨과 두려움이 뒤섞인 채 그 끝에서 무언가를 마주하게 될 것만 같았다.
혼자서 느끼는 설렘은 아프도록 외로웠고, 그 아픔조차 어쩐지 달콤했다.
첫 번째 달이 떠오르기 전, 하빈은 창가에 앉아 조용히 숨을 고르며, 마음속에서 자신이 바라는 삶의 모습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희미한 달빛이 창문 틈으로 스며들고, 그 빛 속에서 하빈의 상상은 현실과 겹쳐지며 묘하게 설레고,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이 마음 한켠을 스쳤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서로의 마음과 슬픔을 조심스레 지켜나가는 날들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하빈은 동시에 가슴 한켠에서 미묘한 불안과 설렘이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행복이 주는 따스함과, 그 행복이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아득한 외로움이 함께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붉은 카드 속 소원처럼, 하빈은 마음속에 은은한 희망을 천천히 채워갔다.
설렘과 불안이 뒤섞인 그 희망 위에서, 그는 조용히 숨을 고르며 스스로를 붙잡았다.
하빈이 붉은 카드에 적은 소원은 단순한 동행이 아니었다.
그 소원은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피어오른, 외로움과 설렘이 뒤섞인 간절한 바람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자신의 삶을 온전히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카드 위 붉은 글씨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카드 위 하빈의 글씨.
소원을 적는 순간, 마음속 깊이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붉은 멍이 천천히 풀려나가는 듯했다.
그러나 푸른 멍은 여전히 하빈의 마음 속 구석구석을 스며들며,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어두운 마음 속으로 스며든 푸른 멍은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며, 마음 구석구석으로 번져갔다.
그 깊고 차가운 감정 속에서 하빈은 속삭였다.
“새빨간 멍을 스스로 마시는 방법은 없는 걸까.”
하빈의 목소리는 작게 떨렸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자리한 아픔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삼키려 하면 할수록, 나는 내가 만든 푸른 멍 속에 깊숙이 빠져 숨이 막힐 것 같아.“
“내가 만든 바다를, 내가 없앨 수 없는 걸까…”
그 묵직한 질문이 마음속에서 물결치듯 울리며, 스스로를 붙잡는 힘조차 가늘게 흔들렸다.
푸른 멍이 거세게 몰아칠 때, 그는 비로소 알았다.
삼키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어루만졌더라면, 붉은 멍은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묵직하게 마음을 누르면서도, 동시에 희미한 위안이 되어 심장을 두드렸다.
하빈은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앞으로는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마주하며, 조금씩 스스로의 멍을 풀어주겠다고.“
그리고 하빈은 오늘 이곳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조용히 일기장을 펼쳤다.
펜끝이 종이를 스치자,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흘러나온 생각들이 글줄 위에 스며들었다.
오래 묻어두었던 감정, 말하지 못한 기억, 그리고 자신도 몰랐던 마음의 결들이 한 줄, 한 줄 종이 위에서 살아났다.
하빈의 일기장 속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픔을 감추려 할수록, 내 안의 푸른 멍은 더욱 짙어져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퍼져갔다.
없애려 삼켰고, 숨기려 애썼지만, 그 모든 시도는 푸른 멍을 잠식시킬 뿐, 나를 더 깊이 잠수하게 만들었다.
눈물 한 방울, 또 한 방울이 모여 마음 속 호수를 이루고, 컵이 가득 차오르면……..
흘러넘친 감정은 사방으로 번져, 숨조차 쉴 수 없을 만큼 내 안을 채운다.
끓는 액체를 그대로 뜨거운 불 위에 올려두면, 결국 넘쳐 흐른다.
마음 속 컵이 가득 차기 전에, 불을 조금씩 조절하듯 내 안을 살피고 조심스럽게 다스려야 한다.
억눌린 감정과 오래 묻어둔 상처가 조금씩 올라오는 순간에도, 나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관찰해야 한다.
넘치고 나서야 깨달음을 얻으려 해도, 이미 뒤늦고, 흔적은 마음 곳곳에 남아 마음을 적신다.
스스로를 살피고 다스리는 일은 어렵지만, 그래야만 폭발하는 감정에 휘말리지 않고, 내 안의 멍과 상처를 조금씩 이해할 수 있다.
삼키지 않고,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있었던 오늘이 나에게는 작은 용기였다.
언젠가 마음을 온전히 나눌 누군가를 기다리며, 오늘은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하빈-
본 작품 《빨간 커피를 마시는 여인》은 저자 채유달의 창작물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제·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