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빨간 빛에 스며든 달의 세계 (5)
#5 [손끝에 스며든 푸른빛]
다음날 새벽, 하빈은 잠결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손끝에 남은 잔여의 온기와 종이 위에 번진 눈물 자국이, 마치 어제의 감정을 다시 끌어안듯 하빈의 마음속을 조용히 데우고 있었다.
붉은 머그컵은 그대로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식어버린 커피 향이 은은히 방 안의 시원한 공기 속을 떠돌았다.
그 향을 맡으며 하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햇살은 아직 서늘한 공기와 섞여,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손끝에 닿는 공기조차 어제와 달리 신선하게 느껴졌다.
하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창가에 놓인 머그컵을 바라보았다. 남은 커피가 어제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했다.
마음 한켠에 묵직하게 남아 있는 지난날의 기억도, 아침의 부드러운 빛과 향에 조금씩 녹아드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하빈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나무들의 잎사귀가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반짝였다.
하루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에게 말을 걸어왔다. 하빈은 그 속삭임을 듣고, 천천히 하루를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손끝에 남은 잠의 여운이 점점 사라지고, 마음은 조금씩 가벼워졌다. 어제의 무게가 남긴 흔적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새로운 날의 공기 속에서 하빈은 스스로를 조금씩 풀어놓았다. 그리고 마음 한 켠에, 오늘이 자신에게 무엇을 가져다줄지 궁금한 기대가 싹트기 시작했다.
빛이 스며드는 테이블에 앉아, 하빈은 마음의 잔향을 천천히 음미했다. 마음을 누군가에게 내줄 준비가 된 지금, 외로움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그 자리에는 조금씩 따스함이 스며들고 있었다.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또 다른 존재를 품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비어 있던 가슴 한구석에 은근한 온기처럼 스며들고 있었다.
하빈은 이제 알았다.
혼자여도 괜찮지만, 누군가 다가와 준다면 기꺼이 마음을 맞대고 함께 걸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신을.
그 마음이 스며들자, 하루가 서서히 어제와 다른 색을 띠기 시작했다. 이미 준비된 마음이 세상 속으로 잔잔히 번져가고 있었다.
식어버린 커피조차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하빈은 외로움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작은 빛을 받아들일 때부터 서서히 다른 색과 온기로 스며든다는 것을 느꼈다.
혼자 사색에 잠겨 있던 하빈.
고요하던 카페 안, 정적을 깨며 문이 살짝 열렸다.
종소리가 가볍게 울리자, 공간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문틈 사이로 들어선 여인의 품에는 두 아이가 안겨 있었고,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세 살쯤 되는 이란성쌍둥이였다.
하빈이 바라본 아이들의 몸에는, 화재 사고 현장을 겪은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잔해와 화상의 자국이 피부 위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고, 아이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아직 의식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었다.
하빈은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여인과 아이들에게 향했다. 여인은 아이들을 푹신한 소파 위에 눕히고, 라벤더 차를 적신 수건으로 조심스레 몸을 닦아주며 담요를 덮어주었다.
몇 시간 뒤, 아이들이 서서히 눈을 떴다.
서빈: ”오빠… 일어나봐, 여기가 어디야…?”
서혁: “ 응…? 여기가 어디지?”
“우리 분명 갇혀 있었는데… 설마, 구조된 건가..!“
서빈: “정말…?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어디에 계신 거지…?”
서빈과 서혁은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살피며, 눈물을 꾹 참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서빈, 서혁: “할머니!!!”
여인은 조심스레 다가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여인: ”예쁜 아가들, 깨어났어요? 괜찮아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이들은 서로를 꼭 끌어안고, 공포에 떨었다.
서빈, 서혁: “누… 누구세요…?”
여인은 몸짓을 최소화하며, 아이들이 놀라지 않도록 차분히 말했다.
“여긴 ‘빨간 컵 속 세상’이에요. 오직 아름다운 사람들만 올 수 있는 곳이죠. 제가 여러분을 이곳에 데리고 왔답니다.”
“여기서는 울고 싶었던 마음, 속상했던 마음, 심지어 숨겨둔 작은 눈물까지도 모두 빨간 컵 속에 담아 커피로 만들 수 있어요.”
“제가 여러분의 커피를 마시면, 여러분이 바라는 소원이 현실로 나타날 거예요. 믿기 어려워도, 정말 마법 같은 일이죠.”
아이들은 서로 두 손을 꼭 잡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하빈은 잠시 멍하니 아이들의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세 살인 아이들이, 지금 벌어진 일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하빈의 마음을 스쳐갔다.
작은 체구와 순수한 눈빛이 떠오르며, 그들에게 닥친 공포와 혼란이 얼마나 깊었을지 잠시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여인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아이들을 위해 코코아 두 잔을 조심스레 준비했다. 라벤더와 메리골드, 그리고 허브 오일을 한 방울씩 섞어, 따뜻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감도는 코코아였다. 컵을 들어 올릴 때마다 퍼지는 향이, 아이들의 긴장된 마음까지 살며시 감싸 안는 듯했다.
여인: “일단 이 코코아를 한 잔씩 마시면서 마음을 가다듬어요. 몸도 진정시키고, 그다음에 천천히 다시 이야기해요.”
아이들은 처음에는 낯선 듯 몸을 살짝 떨며 경계했지만, 달콤한 코코아 향에 마음이 끌려 조심스레 컵을 들고 한 모금씩 마시기 시작했다.
여인: “괜찮아요… 천천히 마셔봐요. 무서워할 거 없어요. 괜찮아요.”
동생 서빈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와, 이거 되게 맛있어요… 구름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에요!”
오빠 서혁이는 입을 크게 벌리며 말했다.
“우와! 진짜 놀이터에 온 것 같아요. 솜사탕처럼 부드럽고 달콤해요.”
그 사이, 여인은 조심스레 아이들에게 스케치북과 색연필을 가져와 선물로 주었다.
“이 스케치북에 마음속 이야기를 자유롭게 그려보세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작은 글씨로 적어도 괜찮아요.”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지만, 곧 작은 손으로 색연필을 쥐고 종이를 채우기 시작했다.
하얀 페이지 위로 색이 번지며, 아이들의 마음이 서서히 드러나는 듯했다.
여인은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말을 이어갔다.
“여기 맛있는 음식도 많으니까, 천천히 먹으면서 마음껏 즐기세요.”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서로를 바라보았고, 조심스레 준비된 간식을 손에 들었다.
딸기 케이크, 미니 붕어빵, 치즈 타르트, 바나나 머핀, 허브 오일 한 방울이 섞인 오렌지 주스.
작은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인 음식들에,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아이들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띠고, 즐겁게 소리쳤다.
서빈, 서혁: “우와, 신난다!!!!!!!!! “
여인은 하빈에게 다가가 따뜻하게 말했다.
“하빈 씨, 일단 밥부터 먹고 소원은 나중에 생각해요. 하빈 씨를 위해 준비했답니다.
손맛 가득 담긴 매콤 갈비찜, 미역국, 쌈밥, 편육, 잡채… 캐모마일 레몬차까지 함께요.”
하빈은 감탄을 숨기지 못하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우와,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사실 오늘은, 하빈조차 잊고 있던 그의 생일이다.
어제 여인은 하빈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잠시 ‘컵 속 세상’ 바깥으로 식료품을 사러 나갔던 것이다.
돌아오는 길, 그녀는 우연히 유치원 화재 사고 현장을 마주했다. 연기와 혼란 속, 아이들은 힘없이 쓰러져 있었고,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구조 요청 소리가 메아리쳤다.
참혹한 현장을 바라보며 여인은 가슴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날 뉴스에는 사고의 원인이 아직 조사 중이라는 소식과 함께,
유치원 원장이 구속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졌다.
여인은 ‘컵 속 세상’으로 돌아와 하빈에게 조심스레 상황을 전했다.
가슴 속 긴장과 무거움을 달래며 말을 이어가는 여인의 목소리는 잔뜩 눌려 있었다.
하빈은 생일을 맞아 마음 한켠이 들뜨기도 했지만,
여인의 얼굴에 스며 있는 심각한 표정을 보고는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하빈은 여인의 표정만 보고도, 단순한 사고가 아님을 직감했다.
뉴스 속 내용은 이미 충분히 무거웠지만, 그보다 더 참혹한 진실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안전하게 대피했지만,
두 아이만 홀로 남겨진 채 방치된 것이다.
원장은 아이들을 그저 ‘관리할 존재’로만 여겼다.
평소처럼 가두고 굶기는 일이 반복되던 가운데,
화재가 발생했지만, 아이들은 방 안에 갇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상태였다.
누적된 학대와 방치가 불러온 참혹한 결과였다.
결국 서빈과 서혁은 화재를 피해 도망치지 못했고, 그대로 사고를 맞이해야 했다.
좁은 공간, 숨 막히는 잿더미,
그리고 작게 뛰는 심장.
평소 원장의 폭력에 이미 지쳐 있었을 아이들은,
이번 화재 속에서 얼마나 공포에 떨며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쳤을까.
하빈은 아이들의 검은 멍을 바라보며 숨을 삼켰다.
그 순간, 창밖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였고,
마치 세상의 슬픔까지 삼키려는 듯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무겁고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잿빛 공기가 천천히 카페 안으로 스며들었다.
비가 내리자, 하빈 마음속 푸른 멍은 더욱 짙어졌고, 아이들의 검은 상처는 한층 선명하게 다가왔다.
차가운 빗방울과 잿더미 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무겁게 가라앉아 천천히 흐르는 듯했다.
손이 차가워 두 손으로 꼭 쥐고 있던 매끈한 컵 표면에 어느새 미세한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것을 하빈은 느꼈다.
조심스레 냅킨을 찾아 컵을 닦았지만, 손끝으로 전해지는 축축한 감촉에 순간 숨이 멎는 듯 잠시 멈칫했다.
부르르 떨며 손끝에 물을 뚝뚝 흘리던 하빈은 ‘어… 나, 왜 이러지……’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순간 멈칫했지만, 무언가를 다짐한 듯 하빈은 발걸음을 돌려 조심스레 아이들에게 시선을 향했다.
불안과 긴장이 온몸을 감싸는 가운데,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가며, 아이들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고 뿌연 연기를 걷어내며 꼭 안아주었다.
하빈의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손끝을 타고 아이들에게 스며들자, 작은 체온과 손길이 닿는 순간 불투명했던 미세한 연기마저 조금씩 맑아지는 듯했다. 떨리던 아이들의 몸과 숨결이 하빈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안정을 되찾았고, 마치 세상 속 공기마저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거세게 내리던 빗줄기가 잔잔해지자, 하빈은 창밖을 바라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은 달이 보이지 않겠구나.“
먹구름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빛이, 잿빛 하늘 속에서도 세상을 조용히 감싸고 있었다.
그 빛을 바라보며, 그는 아직 마음속 깊이 남아 있는 푸른 흔적과 아이들의 검은 상처를 떠올렸다.
비 내리는 창밖 풍경과 섞인 잿빛 공기 속에서, 그 상처들은 마치 세상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담고 있는 듯 묵직하게 그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빗방울이 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빈은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차갑지만 잔잔한 빗소리가, 마음속 뿌연 어둠을 씻어주는 듯했고, 그 안에서 아이들의 떨린 숨결과 작은 체온이 조금씩 떠오르는 듯 느껴졌다.
오늘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하빈의 마음 한켠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하빈은 아이들을 조심스레 안아주며, 조용히 속삭였다.
“괜찮아, 이제 여기서는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아이들은 그의 품 안에서 작은 안도와 따스함을 느끼며, 빗소리와 함께 점점 검은 멍을 씻어냈다.
그의 마음속 푸른 멍과 아이들의 깊은 어둠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창밖 빗소리와 함께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차갑고 습한 공기 사이로, 하루 동안 쌓였던 무게가 빗물에 스며들 듯 서서히 흘러내렸다.
그 순간, 하빈은 알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한 번 스며든 손길이 누군가의 세상에 잔잔한 온기를 남긴다는 것을.
하빈은 손끝에 묻은 작은 물방울을 느끼며, 컵 표면에 맺힌 미세한 남은 물방울까지 다시 조심스레 닦아냈다.
새 커피를 내리며, 이번에는 각설탕을 꺼냈다.
각설탕을 손에 쥔 채, 하빈은 잠시 생각에 푹 잠겼다.
손끝에 닿는 작은 차가움과 달콤함 사이로, 마음속 여러 감정이 뒤엉켰다.
컵 속 각설탕이 따뜻한 커피 속에서 천천히 녹아드는 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 얼어붙었던 부분도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했다.
차가운 커피 속에서는 설탕이 자신을 지키고자 굳어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빈도 긴장한 채 아픔을 삼키는 듯했다.
하빈은 따뜻한 커피 속에서는 설탕이 자유롭게 몸을 맡기듯, 손끝에서 전해진 온기와 믿음 속에서 자신도 자유롭게 몸을 맡기기로 다짐하며,
각설탕을 달콤하게 섞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창가 앞 테이블에 조용히 앉았다.
밖은 아직 새벽의 어둠이 깔려 있었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유리창을 스쳤다.
손끝에 남은 커피의 온기와 달콤함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면서, 잠시나마 복잡했던 생각들이 잔잔하게 가라앉았다.
여인은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생각나는 게 있으면, 언제든 이 스케치북에 그려 보렴.”
그 말은 마치 아이들의 마음에 작은 창을 열어 주는 초대처럼 들렸다.
아이들의 스케치북에는 각 장마다 주제가 적혀 있었고, 첫 장에는 “솜사탕처럼 당신의 마음을 달콤하게 해주던 사람은 누구인가요?” 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서빈은 색연필의 끝을 천천히 움직였다. 종이 위에는 놀이터가 그려지고, 그 위에 할머니와 자신이 마주 앉은 시소가 나타났다.
작은 몸이 위로 오를 때마다, 맞은편에서 할머니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오르내리는 시소의 움직임 속에서, 두 사람의 웃음이 공기처럼 번져나갔다.
서빈은 그림을 바라보며 잠시 손을 멈추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도 시소처럼 오르락내리던 불안이 잦아들고, 대신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자리했다.
서혁은 색연필을 들고 조심스레 종이를 스쳤다. 눈밭 위에서 할머니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얀 눈을 둥글게 뭉쳐 쌓고, 서로 도와가며 눈사람을 완성하던 순간. 반짝이던 웃음, 시린 손을 호호 불어주던 할머니의 손길, 집으로 돌아와 따끈한 어묵탕을 함께 나누던 따스한 공기까지.
색연필이 종이 위를 지나며, 그 모든 순간이 다시 그림 속에서 살아났다. 연한 하늘색과 하얀색이 눈을, 부드러운 분홍색과 노란색이 할머니의 온기를 담았다.
긴장했던 손끝에서 흘러나온 선들이 하나의 장면이 되자, 서혁의 마음에도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그림 속 추억과 현실의 온기가 겹쳐지며, 그의 가슴은 마치 할머니가 호호 불어주듯, 포근하게 물들었다.
하빈은 아이들 옆에 앉아 조용히 지켜보았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그리움과 사랑이 색과 선으로 번져 갔고, 그림 속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픔을 꾹 눌러 담던 아이들이 조심스레 마음을 내보이는 모습을 보며,
하빈의 가슴에도 잔잔한 울림이 번졌다.
옆에 앉은 하빈도 일기장을 조심스레 펼쳤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마음속 깊이 흩어진 파편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글과 선으로 이어 나갔다.
아이들의 스케치북에서 묻어나오는 그리움과 사랑이 눈앞으로 흘러들자, 닫혀 있던 마음도 서서히 풀려 나갔다.
그림과 글이 나란히 놓인 그 순간, 카페 안은 말없이 울림으로 가득 찼다.
그 울림은 소리 없는 파도처럼 조용히, 그러나 흔들림 없이 퍼져 나가, 끝내 서로의 상처를 덮어 주는 치유의 숨결로 번져갔다.
하빈은 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이 혼자가 아님을 느꼈다. 아이들의 떨리는 손끝과 조심스레 내보이는 마음의 조각들이, 마치 오래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속삭여왔다.
“우리도, 괜찮아질 수 있어요.”
그리고 그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마음속에서 천천히 답을 건넸다.
“응… 나도, 이제 서서히 괜찮아질 거야.”
글과 그림, 작은 손짓과 미소가 만들어낸 보이지 않는 선들이, 카페 안을 부드럽게 감싸며 치유의 숨결로 번져갔다. 하빈은 잠시 눈을 감고 그 기운을 가슴 깊이 받아들였다.
누적된 고통과 외로움이 조금씩 풀려나가는 듯, 마음속 어둡던 자리마다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이들의 미소를 바라보며 작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는, 그리고 앞으로 조금씩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다정한 약속이었다.
그동안 차가운 커피 같은 세상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마음을 단단히 굳히며 살아온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제, 이 따뜻한 커피 같은 세상 속에서는, 나 자신을 지키면서도 조금씩 굳은살을 풀어보고 싶다.
손끝과 체온 속으로 스며드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마음을 천천히, 그러나 온전히 풀어놓기로 했다.
마치 각설탕이 따뜻한 커피 속에서 스스로를 맡기듯, 나도 나를 지키면서 세상 속으로 달콤하게 몸을 맡기리라.
-하빈-
본 작품 《빨간 커피를 마시는 여인》은 저자 채유달의 창작물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제·배포를 금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