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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커피 속 요동

1부:빨간 빛에 스며든 달의 세계 (3)

by 윤주MAYOOZE
#3 [빨간 커피 속 요동]

하빈은 비몽사몽한 눈을 비비며, 서서히 눈을 떴다.

“여기가… 어디지?”

처음 들어왔던 카페와는 완전히 다른 장소였다.

놀이공원을 닮은 알록달록 아기자기한 공간.

창문 너머로 부드러운 햇살이 스며들고, 벽에는 작은 그림과 반짝이는 장식이 가득했다.

바닥에는 하얀 조약돌과 미세한 장미 꽃잎이 흩어져 있었다. 공기에는 달콤한 커피 향과 은은한 장미 향이 섞여, 마음까지 살짝 녹이는 듯했다.


그 자리에는 여전히 빨간 컵을 든 여인이 앉아 있었다. 여인은 하빈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신가요? 갑자기 기절하셨어요.”


하빈은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제가 처음 왔던 곳과… 다른 곳인 것 같은데… 아닌가…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요?”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채셨군요. 여긴 새로운 세상이에요. 저는 빨간 컵 속으로, 슬픔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데려와요. 그들의 새빨간 멍을 마시죠.”


하빈은 혼란스러웠다.

“새로운 세상…? 빨간 컵 속…? 새빨간 멍…? 무슨 소리죠…?”


여인이 하빈을 향해 컵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저는 눈물과 고통을 마시며 살아가요.”
“당신의 마음 속 붉은 상처와 눈물, 아픔을 제가 흡수하면, 당신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어요.
“새빨간 숨을 달콤한 커피로 만들어서 제가 마시는 거예요.”



하빈은 멍하니 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무튼 여기 꿈인 것 같은데, 꿈이라면… 어차피 제 인생 더 바꿀 것도 없을 테니… 뭐 해보죠.”



그는 혼잣말로 궁시렁거리다 숨을 고르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여인은 빨간 커피 잔을 하빈의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당신의 눈물과 슬픔, 고통, 아픔을 모두 이 빨간 커피잔에 담아 아주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오세요.
그럼 당신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할게요. 동의하십니까? 네, 아니오로 답해주세요.”


하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결심이 담겨 있었다.

“네.”




순간, 카페의 풍경이 휘리릭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벽과 바닥, 심지어 천장까지 그의 삶이 사진과 영상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울던 모습.

학창시절, 친구들에게 놀림받으며 악착같이 버텨온 모습.

회사에서 억울하게 치이고, 상사의 비난 속에서 눈물을 삼키던 모습.

허기진 삼각김밥을 꾸역꾸역 먹고 잠든 날.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었다. 하빈은 사진 앞에 주저앉았다.

“나… 이렇게 살아왔구나… 이렇게 버텨왔구나…”


숨이 막히듯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 놓인 빨간 커피잔에는 새빨간 눈물이 조용히 흘러넘쳤다.



장면은 또다시 바뀌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날, 자살시도를 포기하고 높은 건물 옥상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가던 날.

그 길에 그를 지켜보던 길고양이 치타. 유일한 가족처럼 느껴졌던 치타와 함께한 시간.

고양이가 나이를 먹고 무지개다리를 건너던 날까지.


하빈은 그 모든 순간을, 외로움과 희망, 의지와 상실을 다시 마주했다.

그는 고양이를 꼭 안고, 몸과 마음을 떨며 한참을 울었다.




눈물은 사흘째 멈추지 않았다.

빨간 커피잔 안에서는 그의 눈물이 흘러넘쳐, 어느새 작은 호수처럼 잔을 가득 채웠다.


하빈은 눈에 붉은 멍을 담아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여인은 같은 자리에서 하빈의 붉은 숨을 담은 커피를 천천히 마셨다.

하빈은 몸을 뒤로 젖히며 놀랐다.

여인이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가슴 속 응어리와 답답함이 조금씩 사라졌다.


몸이 한결 가벼워지고, 마음 속 묵직하게 자리 잡았던 붉은 숨은 푸른빛으로 빛나며 날개를 펼쳤다.

세상 위를 나는 듯 자유로웠다.




여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음… 살 것 같다. 이제야 숨이 좀 트이네요.”
“쉽게 인생이 바뀌면 재미없죠. 아직 할 게 더 남았어요. 이제 마지막 단계입니다.”




그녀는 빨간 테이블 위에 노란빛이 도는 커피를 담아 건넸다.

“이제 이 커피를 마시면서, 과거의 스스로에게 고마웠던 점 세 가지를 떠올려보세요.
단, 이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그전에 떠올리지 못하면 기회는 사라집니다. “


하빈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스스로에게 고마웠던 점… 그런 걸 생각해 본 적 있었나? 갑자기 생각하려니 머리가 시끄럽다. 아무거나 말하면 안 되겠지….”


그는 잔머리를 굴리며, 커피를 혀끝에 닿을 듯 살짝, 아주 조금씩 마시며 깊이 생각하고자 다짐했다.

그러나, 하빈이 평생 마신 커피 중에서도 가장 진한 풍미였다. 그 맛을 온전히 음미하고 느끼고 싶었지만, 절제하며 조금씩 마시는 것이 쉽지 않았다.

커피의 따뜻함이 입안을 감싸며, 온몸을 스며들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이 조금씩 열리는 느낌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지난 시간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리고 마침내


1. 삶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지금까지 살아낸 것.

2. 타인에게 아픔을 선물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 것.

3. 힘들어도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지켜온 것.



하빈은 이 세 가지를 조심스레 마음속에서 꺼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던 점으로 정했다.

커피의 따뜻한 향이 숨결과 함께 퍼지자, 마음속 어두운 구석이 조금씩 빛을 얻는 듯했다.

그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여인은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가져왔다.


여인에게는 세 가지의 루나 카드가 있다.

루나 카드는 소원을 적으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법의 카드다. 소원을 적은 카드는 티백으로 변하고, 그 티백으로 우려낸 커피를 마시는 순간, 소원은 즉시 현실이 된다.


빨간 루나 카드: 원하는 소원대로 모든 것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카드.

초록 루나 카드: 과거 삶 속에서 바꾸고 싶은 소원 2가지만 선택해 새로운 길을 열 수 있는 마법의 카드.

파란 루나 카드: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원하는 소원 1가지를 선택해 이루게 해주는 마법의 카드.

노란 루나 카드: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지우고, 새로운 기쁨과 희망으로 마음을 채워주는 마법의 씨앗카드.




여인이 빨간 카드를 손에 들고 꺼내는 순간은, 이 세계에서도 극히 드문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여인은 빨간 루나 카드를 하빈이 앉아있는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올려두었다.

카드 위에 달빛이 살짝 스며들자, 여인은 속삭였다.


“당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할 시간은, 달이 세 번 떠오르는 동안만 주어집니다.”



그 순간, 하빈의 심장은 설렘과 긴장으로 동시에 뛰었다. 카드 위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들며 조용히 반짝였다.


달이 세 번 뜨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만 허락되는 선택.


하빈의 심장은 미세하게 떨렸고,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묵은 두려움과 공허가 서서히 녹아내리며, 새로운 삶을 향한 부드러운 용기가 스며들었다.



하빈은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꿈처럼 은은히 빛나는 이 세계 속에서는 자신의 모든 소망이 조용히 현실로 피어날 수 있음을 느꼈다.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속 가장 밝게 빛나는 새로운 삶의 모습을 조심스레 그려 보았다.














본 작품 《빨간 커피를 마시는 여인》은 저자 채유달의 창작물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제·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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