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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러나는 마음의 열쇠]

1부:빨간 빛에 스며든 달의 세계 (11)

by 윤주MAYOOZE
#11 [우러나는 마음의 열쇠]

밤새 호박빛 노을을 물들이던 하늘은 이미 옅은 새벽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은 여전히 무겁고 지쳐 있었지만, 어제의 열기와 한기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숨결 사이로 스며드는 공기가 부드럽고 맑았다.


“어라… 그렇게 금세 잠이 들었구나.”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눈을 깜박였다.


머리맡에는 젖은 수건이 놓여 있었고, 담요는 단단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라벤더 향이 은근히 남아 있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옆을 돌아보자, 여인이 조용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듯, 그녀의 눈가에는 피곤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러나 표정은 고요했고, 긴 밤을 함께 지켜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함이 묻어나 있었다.


하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목이 메어왔다.

“밤새… 곁에 있어주신 거예요?”


여인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네. 다행히 열은 조금 내렸네요. 이제 한 고비는 넘긴 것 같아요.”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게 스며들어, 하빈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렸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밤사이 몸살이 몰고 온 열병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오래 묵은 마음의 상처를 씻어낸 것 같았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빈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여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감사할 때가 아니에요. 이제 몸이 회복되면,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답니다.”


하빈은 당황한 듯 여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 해야 할 이야기요…? 뭔가요…?”


여인은 잠시 머뭇거리듯 그의 옆에 앉아 말했다.

“하빈 씨… 몸이 좀 괜찮아지셨다면… 혹시, 차를 우려보실래요?”


하빈은 눈을 크게 깜박이며 의아해했다.

“갑자기…제가… 차를요?”


여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차를 마시는 것도 좋지만, 직접 우려보는 것도 마음을 정리하고 진정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거든요.

“차 속에 마음을 담는 법을 배우는 거예요. 마음을 천천히 내어놓는 연습이랄까요.”


하빈은 담요를 여미며 몸을 조금 일으켰다.

“차 속에… 마음을 담는다고요?”


여인은 작게 웃으며 찻잎과 주전자, 작은 잔을 준비했다.


“맞아요. 물 속에 잠긴 찻잎이 서서히 색을 내듯, 마음도 천천히 우러나야 진짜 향이 피어나거든요.

급히 서두르면 잡념만 섞이고, 조용히 기다릴 때 비로소 마음 깊은 평화가 찾아온답니다.”


하빈은 손끝에 닿은 잔과 찻잎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듯 말했다.

“우와… 좋네요. 배우고 싶습니다. 마음을 담아 차를 우려볼게요.”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주전자와 찻잎, 그리고 은은한 향기를 방 안 가득 퍼뜨릴 준비를 했다.


하빈은 그녀의 설명을 따라 조심스레 찻잎을 주전자에 넣었다.

뜨거운 물이 찻잎을 감싸자, 잔 속에서 서서히 빛과 향이 피어올랐다.


물 속에 잠긴 찻잎은 마치 조심스레 춤을 추듯 색을 내며 움직였다.

휘저어도, 흔들어도 향과 빛은 서서히 퍼졌고, 그의 마음도 함께 깊은 향을 뿜어내며 퍼졌다.


하빈은 잠시 손을 멈추고, 잔 속에서 피어오르는 황금빛을 오래 바라보았다.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아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방 안 가득 울려 퍼졌다.


여인은 잔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조급하게 건지면 깊은 맛은 숨어버려요. 조금 더 머물러야 합니다. 오래 스스로를 내어놓아야 향이 피어나듯, 마음도 마찬가지예요.

조금씩, 천천히 자신을 내어놓으면 진짜 마음이 피어나죠.”


하빈은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첫 모금을 삼켰다.

따뜻한 향과 깊은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오랫동안 눌러두었던 긴장과 불안이 조금씩 풀려나갔다.

온몸이 따스해지며, 몸살로 뭉쳐있던 힘겨움도 희미하게 가라앉았다.


“…이렇게 마음을 다해 기다리는 시간이… 이렇게 울림을 주다니.”

하빈은 잔을 내려놓고, 숨을 고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인은 살짝 미소 지었다.

“차를 내리는 동안 배우듯, 삶도 기다림 속에서 진가를 드러내요.

조급함 없이 천천히 마음을 내어줄 때, 비로소 향과 빛이 퍼집니다.

오늘, 당신이 느낀 온기와 향처럼 말이죠.”


하빈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마치 마음을 다잡듯 조심스레 떴다.

차의 온기와 향이 몸과 마음을 채우며, 지난 날의 아픔과 고통도 함께 흘러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는 가슴 깊이 작은 깨달음을 얻었다.

“차를 우려내는 동안, 내 마음도 천천히 우러나오는구나.“


“그냥 기다려도 괜찮아.”


“마음이 향처럼 천천히 퍼지도록 두면 되겠구나….”


아직 세상이 꿈속에 잠긴 시간, 방 안에는 은은한 양초빛만이 조용히 깜박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고요했고,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하빈은 처음으로 마음을 다해 기다리는 시간의 소중함을 몸과 마음으로 배웠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내면에 조용하지만 깊은 평온이 스며들었다.



평화로운 순간도 잠시, 여인의 몸은 우러나듯 투명하게 흩어지며, 서서히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겨진 것은 한 장의 편지, 작은 틴케이스, 그리고 열쇠뿐.


하빈은 숨을 죽인 채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편지는 아무런 봉인도 없이 그의 손에 놓여 있었고, 글자 하나하나가 낮게 속삭이는 듯, 알 수 없는 의미와 비밀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영문을 잃은 채 서 있었다.

입술은 굳게 다물렸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저 편지와 작은 물건들을 눈앞에 두고, 가만히 떨리는 손과 심장을 느낄 뿐이었다.









본 작품 《빨간 커피를 마시는 여인》은 저자 채유달의 창작물로,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재·복제·배포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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