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흔적, 젖은 머리카락

_덜 자란 20대 눈에 비친 젖은 머리카락, 뒤늦게 깨달은 헌신의 무게.

by 덜자란사십대

이 이야기 역시 할머니께서 병원에 계실 때, 제가 잠시 간호를 하며 겪었던 일입니다. 할머니는 스텐트 시술을 받으신 직후였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연세가 있으셔서 그랬는지, 지혈이 잘 안 되었던 모양이에요. 회복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겼는데도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며 할머니의 상태를 확인하셨습니다. 가끔 들려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곤 했죠.


그러다 다음 날 아침, 할머니를 보러 병실에 들어섰는데 그야말로 난리가 난 거예요. 할머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지셔서 의료진들이 막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죠. 그때 의사 선생님들이 할머니에게 심폐소생술(CPR)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그 혼란 속에서 유독 제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어요. 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의사 선생님이었죠.


머리를 감다가 오셨는지, 할머니를 처치하느라 땀과 뒤섞인 머리카락이 온통 젖어 있었습니다. 심폐소생술로 몸이 움직일 때마다 마르지도 못한 머리칼이 격렬하게 흔들렸죠.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그 모습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당시에는 '머리 말릴 시간조차 없었나?'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 할머니를 살리려고 애쓰시는구나', '정말 고맙다'는 마음이 훨씬 더 컸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저에게까지 그분의 힘든 기색이 고스란히 전해질 만큼 절박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해서 할머니는 퇴원을 하셨어요. 결국 할머니는 시간이 조금 더 흐른 뒤 세상을 떠나셨지만,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의 헌신적인 치료가 없었다면 할머니는 그때보다 더 먼저 저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아직 '덜 자란' 20대였던 저는 눈앞의 현상만 보고 판단하는 미숙함이 있었어요. 그러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날 땀과 물에 젖었던 젊은 의사 선생님의 머리카락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생명을 향한 헌신과 책임감이 남긴 숭고한 흔적으로 기억돼요. 그분 덕분에 할머니와 저는 짧게나마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있었으니까요.

이전 16화짐이 되었던 날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