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시선에서 도망친 덕분에

by 괜찮지않은사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날이 있었을까. 어린 시절부터 어디선가 누군가는 나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 시선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예의 바르다", "공부 잘한다", "착하다"는 말이 칭찬처럼 들릴 때도 있었지만, 그 말이 기준이 되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닌, ‘보여지는 나’를 연기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나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방향으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거울 속 내가 낯설게 느껴졌고,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나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걸.

타인의 시선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말 한마디가 인생의 결정을 바꾸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좋아하던 것도 흉이 되곤 한다. 나는 그게 싫었다. 그래서 점점 말수가 줄었고,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법을 익혔다.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워졌고, 꿈을 꾼다는 게 민망해졌다. ‘나답게’보다는 ‘무난하게’가 더 안전했으니까. 그렇게 익숙해진 삶은 편안했지만, 내 안은 점점 말라갔다. 하고 싶은 게 있어도 ‘내가 감히’라는 생각에 접어두고, 선택의 순간마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를 먼저 떠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한 연극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한 번은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 한 번만,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내가 원하는 걸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정말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결과는 예상보다 단순했다. 무너지지도 않았고, 누군가 나를 미워하거나 손가락질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만 빼고 모두가 그대로였고, 나는 그제야 알게 됐다. 내가 그렇게나 신경 썼던 시선들은 결국 내 마음속 상상일 뿐이었다는 걸. 세상은 그렇게까지 나를 주의 깊게 보고 있지 않았고, 나의 도망은 타인보다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 도망 이후, 나는 조금씩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싫어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처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오랫동안 억눌러왔던 질문이라 낯설고 두려웠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나에게 시간을 주고, 시선을 주자 서서히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이런 걸 해보고 싶었어." "그때 그 말, 정말 상처였어." "사실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싶진 않아." 타인의 시선으로 채워져 있던 마음 안에, 조심스레 나의 문장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야 나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어느 정도 타인의 시선은 필요하다고. 맞는 말이다.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시선이 삶의 중심이 되어버릴 때, 우리는 스스로를 잃어간다는 걸. 그래서 나는 적당한 선을 정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되 ‘지배’당하지 않기로.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는 삶이 아니라, 내 기대에 응답하는 삶을 살기로. 물론 아직도 누군가의 평가 앞에 주춤할 때도 있고, 내 선택이 틀렸다는 듯한 말에 흔들릴 때도 있다. 그래도 이제는 도망칠 줄 안다. 필요하다면 과감히 그 자리를 벗어나 나를 지킨다.

도망은 비겁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지키기 위한 용기였다. 모두가 참고 견디는 것을 외면한 게 아니라, 나도 살아남기 위해 다른 길을 택한 거였다. 그 덕분에 나는 내 속도를 찾았고, 나다운 모습을 조금씩 되찾아가고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도망쳤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해치는 방식으로 살아가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제 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살아갈 것이다. 가끔은 도망쳐도 된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건 도망이 아니라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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