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공기는 차갑고 묵직했다. 호수 위로 흰 안개가 깔려 수면은 거울처럼 잠잠했지만, 그 아래에서는 긴장감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독 앞에 줄지어 선 보트들은 번쩍이는 랩핑과 스폰서 로고로 무장해 있었다. 엔진을 가볍게 울리며 서로의 힘을 과시하듯 진동을 뿜어냈다. 그러나 맨 끝, 그 화려한 줄에서 멀리 떨어진 한 곳은 다른 공기를 품고 있었다. 낡은 알루미늄 바디의 보트 한 대.( 배스 경기 보트 FRP라고 부른 배) 페인트가 벗겨져 쇳빛이 드러났고, 스티커는 반쯤 뜯겨 있었다.
그 위에 서 있는 사내, 한국인 한준은 고개를 숙인 채 배스로드 라인 매듭을 고쳐 묶었다. 모자챙에 스며든 땀자국이 눈앞에 드리웠다. 손끝은 침착했지만, 손등의 핏줄이 긴장으로 도드라졌다. 낡은 릴에서는 드르륵—톱니가 억지로 맞물리는 듯한 삐걱거림이 흘러나왔다. 아니 서걱거린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 소리는 작은 예고처럼 들렸다. 이 장비로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순간 스쳐간 의심을 그는 억눌렀다. 아니, 장비가 아니라 손끝이 문제지. 내 손이 버티면 된다.
이미지 1: 안개 낀 독 끝, 최신 보트 행렬과 대비되는 낡은 알루미늄 보트
“저거 봐, 고철 아니냐?”
관중석에서 터진 웃음소리에 몇몇 여성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속에 낡은 보트를 확대해 보여주며 킥킥댔다. 누군가는 벌써 조롱 섞인 자막을 떠올렸을 것이다. MC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마지막 선수! 한국에서 온 신참—이름은, 음, 발음이 조금 어렵군요. 어쨌든 환영합니다!”
환호는 미지근했다. 마지못한 박수 소리 몇 번이 허공에 흩어졌다.
한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라인에 침을 묻히고 다시 조였다. 나는 왜 여기 서 있는 걸까? 짧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생각할 틈은 없다. 집중해야 한다. 낡은 보트에 배어든 기름 냄새와, 이른 아침 차가운 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심판석에서는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오늘은 주지사 아들 리처드가 상위권에 들어야지.”
“카르텔 쪽은 라울을 밀라고 하지 않았나?”
협회장 찰스는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봉투를 쓸어내렸다. 이 돈은 단순한 뇌물이 아니었다. 윗선. 백악관까지 이어지는 비선 채널의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이미지 2: 심판석 책상 위 봉투와 커피잔, 옆으로 기울어진 스포트라이트
기자석에서도 속삭임이 흘렀다.
“외국인이라 안전 검증도 허술했다더라.”
“이번 경기를 연방에서 주목한다지?”
리사 심판은 얼굴을 굳히고 펜을 움켜쥐었다. 메모장 위에는 한 단어가 굵게 새겨졌다. ‘편견’. 그녀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출발 직전, 한준의 보트 밑에서 금속이 희미하게 번쩍였다. 정비 스태프 한 명이 흘끗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작은 의심은 언제나 무시되는 법이었다. 시스템은 이미 그를 배제하고 있었다.
사이렌이 울렸다. 보트들이 동시에 튀어나갔다. 엔진음이 겹치며 허공을 찢었다. 수면은 칼로 가른 듯 흰 파도를 내뿜었다.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귀를 때렸다. 관중석이 환호로 뒤흔들렸다. 그러나 그 직후, 선두 쪽에서 끔찍한 굉음이 터졌다.
“쾅!”
화염이 솟구치고, 물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다. 파편이 빗발치듯 날아와 데크에 무자비하게 박혔다.
관중석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고, 어머니는 아이를 끌어안았다. 노인은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이고 주저앉았다. 기자가 셔터를 누르다 카메라를 떨어뜨렸고, 플래시는 허공에서 헛불꽃을 터뜨렸다. 종이컵이 구르고, 핸드폰이 바닥을 튀었다. 환호는 비명으로 바뀌었다.
이미지 3: 폭발 직후 솟는 물기둥과 혼란에 빠진 관중
한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등 뒤로 파편이 스쳤다. 아이러니하게도, 엔진을 켜지 않은 그의 보트는 폭발 중심에서 약간 비켜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살아남았다… 하지만 언제까지일까!~~
심판석 무전이 튀었다.
“사고로 처리해. 기자들 접근 막아.”
찰스는 커피잔을 들었지만 눈빛은 흔들렸다. 리사는 떨리는 손으로 메모장에 굵게 썼다. ‘폭발 흔적’. 글씨 끝에는 잉크가 번졌다.
이미지 4: 메모장 위에 적힌 단어 ‘폭발 흔적’을 누르는 펜 끝
호수 위로 안개가 다시 내려앉았다. 연기와 불길 사이, 한준은 묵묵히 앞으로만 바라봤다.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이 길은 단순한 경기의 길이 아니라, 자신을 집어삼킬 어둠으로 이어지는 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