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과 배려가 성공보다 먼저여야 하는 심리학적 이유
브런치북 '위대해질 예정은 없습니다' 누군가의 생명줄이 될 묵묵함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누군가 위태로운 순간에 붙잡을 수 있도록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일, 그것이 제가 창작자로서 선택한 삶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처럼 거칠고 메마른 세상 속에서, 누가 기꺼이 자신의 팔을 뻗어 그 무거운 구명튜브를 던져줄 수 있을까요?
최근 한국의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조사 결과를 보면 아직은 우리 사회공동체가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부모들이 자녀에게 가장 바라는 모습은 치열한 경쟁에서의 승리도, 압도적인 성취도 아니었습니다. 설문 문항에 ‘착하게 살아라’라는 투박한 표현은 없었지만, 그 본질인 정직과 배려, 그리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책임감이 늘 상위권을 차지했습니다. 특히 '정직'은 부모들이 꼽는 가장 소중한 가치로 반복해서 등장하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 사회가 오로지 성공만을 쫓는다고 냉소하곤 하지만, 이 결과는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흐르는 또 다른 진실을 보여줍니다.
부모들의 마음 한편에는 내 아이가 성공한 사람 이전에 '믿을 수 있는 사람',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착하게 살아라”는 옛말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성'이나 '사회성'이라는 세련된 언어로 옷을 갈아입고 여전히 우리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취의 결과는 주변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 있지만, 사람을 대하는 진실한 태도만큼은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굳건한 자산이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바로 그 '이타적으로 산다는 것'의 본질, 우리가 왜 타인을 향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타주의를 나를 깎아 타인을 채우는 고통스러운 '희생'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하지만 심리학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타적 삶은 오히려 나를 가장 온전하게 채워주는 '능동적인 확장'에 가깝습니다. "나를 내어주는 행위가 어떻게 나를 채울 수 있을까?"라는 이 신비로운 질문에 대한 해답은, 제가 요즘 전하고 있는 '역설'의 미학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이 역설의 신비함을 저는 사춘기 시절, 이웃에 살던 한 소녀를 통해 처음 배웠습니다. 친구들이 ‘솜사탕’이라 부를 만큼 통통한 볼이 유난히 예쁜 아이였습니다. 그녀는 소아마비 후유증으로 다리가 조금 불편했습니다. 평소엔 잘 모르다가도, 조금이라도 빨리 걷거나 달리면 그 차이가 눈에 띄곤 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벤허’를 보러 갔을 때였습니다. 일찍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데, 그녀의 학교 학생들이 들어왔고 우연히도 제 옆에 그녀가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일어나 제 자리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녀는 고맙다며 수줍게 웃더니, 제가 미안해할까 봐 그랬는지 자기 의자의 팔걸이에 걸터앉으라고 살며시 권하더군요.
그날의 ‘벤허’는 제게 단순한 영화가 아닌, 생애 첫 ‘사랑의 벤치’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코끝을 스치는 듯한 그녀의 향기, 그리고 타인을 위해 자리를 내어준 덕분에 오히려 그녀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닿을 수 있었던 그 떨림을 생생히 기억합니다. 그날 이후 저는 매일 아침 버스 정류장에서 그녀를 기다렸습니다. 그녀보다 먼저 버스에 올라 빈자리를 사수하고,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양보하는 일은 제 사춘기 시절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친구들은 묻곤 했습니다. "왜 장애가 있는 아이를 좋아하냐"라고 말이죠. 터무니없는 질문에 화가 났지만, 제 마음속에는 오직 그녀의 부족한 다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맑은 진심뿐이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정의하기엔 너무 어렸지만,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그 순수한 열망이 저를 움직였던 것입니다. 제 삶에서 '사랑의 역설'은 그렇게 소리 없이 시작되었습니다.
거울 뉴런이 건네는 공감의 초대장
우리 뇌에는 '거울 뉴런(Mirror Neurons)'이라는 신비로운 장치가 숨겨져 있답니다. 타인의 아픔을 목격할 때 나의 뇌 역시 마치 그 고통을 직접 겪는 것처럼 반응하게 하는 마음의 창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눈물을 흘릴 때 우리 마음이 함께 미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지요. 생물학적으로 우리는 타인의 아픔에 무관심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필요를 발견했을 때 그것을 메워주고 싶어지는 마음은, 우리 인간이 가진 가장 고귀한 본능적 반응입니다.
발달심리학자 마틴 호프만(Martin Hoffman)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공감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말합니다. 옆에 있는 아기가 울면 따라 우는 '반사적 울음'이 그 증거입니다. 이타적인 삶이란 이 본능적인 공감을 성숙한 선택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입니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마음으로 전해질 때, 우리는 그 불편함을 함께 해결하기 위해 손을 내밉니다. 결국 타인을 돕는 행위는 타인의 고통을 덜어줌으로써 내 안의 심리적 긴장을 해소하는, 지극히 건강하고도 아름다운 생존 전략인 셈입니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라는 말은 이기적인 변명이 아니라, 함께 아파할 줄 아는 인간이 내뱉는 가장 솔직하고 따뜻한 고백입니다.
가짜 자기(False Self)를 넘어 자기 초월로
에이브러햄 매슬로(Abraham Maslow)는 인간의 욕구 중 최상위 단계를 '자기실현'이라 보았지만,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 그는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인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을 제시했습니다. 내 안의 욕망을 채우는 단계를 넘어, 나라는 울타리를 허물고 더 큰 가치나 타인을 위해 기여할 때 인간은 비로소 완전한 평온에 도달한다는 통찰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갇혀, 타인의 시선에 맞춘 '가짜 자기(False Self)'를 가꾸느라 에너지를 다 써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이타적인 행위에 몰입하는 순간, 역설적으로 그 무겁던 자아의 무게는 가벼워집니다. 누군가를 위해 자리를 비워두고 구명튜브를 손질하는 동안,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잠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는 단순히 도파민의 즐거움이 아니라, 자아의 경계가 확장되며 느끼는 영적인 해방감에 가깝습니다.
상호의존성: 우리는 서로의 안전 기지입니다
존 보울비의 애착 이론이 아이와 양육자의 관계를 설명한다면, 성숙한 이타주의는 이 관계를 우리 사회 전체로 넓혀줍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는 든든한 '안전 기지(Secure Base)'가 되어주어야 하며, 동시에 타인의 따스한 지지를 필요로 하는 연약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타적인 삶은 '내가 우월해서 남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나 역시 언제든 거친 바다에 빠질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겸손함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던진 구명튜브가 언젠가 내가 표류할 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즉 '호혜적 이타주의'는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신뢰의 끈입니다.
독일에서 온 제자가 맥주 한 잔의 유혹보다 스승에게 안부를 전하는 일을 택했던 것처럼, 진심 어린 마음은 단절된 개인들을 다시 하나로 이어주는 가장 단단한 접착제가 되어줍니다.
결론: 묵묵함이 만드는 기적
이타적으로 산다는 것은 매일 거창한 영웅적 결단을 내리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내 마음 한편에 타인이 머물 수 있는 의자를 늘 깨끗이 닦아두는 정성입니다. 내가 가진 작은 지식과 경험이 누군가에게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그 소박한 마음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 더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돕는 행위는 결국 나를 구원하는 일과 같습니다. 타인의 눈물을 닦아줄 때 내 손등의 흉터도 어느새 함께 아물어가는 법이니까요. 오늘도 저는 낡은 주황색 구명튜브를 다시 한번 정성껏 살핍니다. 이 묵묵한 손길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시작할 용기가 되고, 저에게는 제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단단한 의미가 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