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한 글인가, 선택된 글인가

싱코그래피: 편집된 현실에서의 탈출

by Itz토퍼

"지금 읽고 있는 이 브런치스토리, 당신이 '선택한 글'인가 아니면 '선택된 글'인가?"


편집된 하루


나는 카페를 운영한다. 서른다섯에 차린 열두 평짜리 공간이다. 원두는 직접 고르고, 음악은 매일 아침 바꾸고, 컵 받침 하나도 내 취항으로 채웠다. 나는 이 공간이 온전히 나의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공간에 내 선택은 얼마나 채워져 있을까.


카운터 뒤에 서 있으면 보인다. 손님들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낸다. 메뉴판을 보는 게 아니다. 이미 누군가가 편집해 놓은 이 공간의 이미지를, 눈앞에 실물이 있는데도 화면으로 먼저 확인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와 실물이 일치하면 안도하고, 어긋나면 실망한다. 처음엔 그 괴리가 낯설었지만, 이제는 나도 그 편집된 환상을 관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고르고, 해시태그를 계산하고, 알고리즘이 좋아할 각도로 내부를 재배치한다. 어느 순간부터 커피를 내리는 일보다, 플랫폼이 요구하는 형식에 맞게 내 공간을 '편집'하는 일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되었다.


이상하다고 느낀 건 배달 앱 때문이었다.


처음엔 망설였다. 이 공간의 온도와 향을 종이박스에 담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플랫폼 안에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시대였다. 매출을 위해 나는 앱의 노출 로직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떤 시간대에 광고를 올려야 상단에 뜨는지, 어떤 키워드가 검색을 유도하는지. 내가 고른 원두의 배전도를 고민하는 시간보다, 화면 속 수치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길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에 나는 다른 카페의 커피를 배달 앱으로 주문했다.


리뷰를 읽고 별점을 확인했다. 앱이 추천한 순서대로 훑다가 '가장 많이 팔린' 메뉴를 눌렀다. 집에 도착한 커피를 마시며 문득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가 마시고 싶은 걸 마시는가, 아니면 알고리즘이 내 입맛이라고 규정한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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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외화 중, 영국 드라마 《더 캡처》에는 'Correction(교정)'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온다. 국가 정보기관이 CCTV 영상을 실시간으로 편집하여 현실을 재구성하는 시스템이다. 명분은 공익이었지만, 그 본질은 조작이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무서운 장면은 조작이 밝혀지는 순간이 아니다. 진실을 알게 된 형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 채 시스템에 순응하는 장면이다. 이미 삶의 모든 질서가 그 편집된 현실과 단단히 엮여 있기 때문에 저항이 아닌, 순응을 택하는 것이다.


나는 그 형사의 처지가 남일 같지 않다. 드라마 속 시스템이 타인의 영상을 강제로 조작한다면, 현실의 플랫폼은 나의 욕망을 자발적으로 조작하게 만든다. 나는 알고리즘이 내 카페를 어떻게 난도질하고 재조립하는지 안다. 리뷰 몇 개가 실재하는 공간의 가치를 앞지르고, 별점이 신뢰를 대체한다는 것을.


가장 비극적인 지점은 나 역시 소비자로서 그 '교정'된 방식으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이다. 조작의 메커니즘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배달 앱을 켜고, 추천 순서대로 스크롤을 내리며, 알고리즘이 점지해 준 '가장 많이 팔린' 메뉴를 누른다. 시스템이 나에게 가하는 Correction인 줄 알면서도, 그 효율의 안락함에서 벗어날 힘이 내게는 없다.


"어차피 나 혼자 안 쓴다고 뭐가 바뀌겠어."


이 생각이 드는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건 내 생각인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하는 가장 조용한 Correction인가. 생존을 위해 내 취향을 지우고 알고리즘에 나를 끼워 맞추는 행위는, 어쩌면 나 스스로가 내 삶을 실시간으로 조작하고 있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카페를 닫고 혼자 앉아 있으면 가끔 스스로에게 자문하게 된다. "나는 왜 이 일을 시작했지?" 원두향이 좋았고, 내 손으로 무언가를 고르고 만드는 감각이 좋았다. 그 마음은 여전히 여기 실재한다. 하지만 매일 확인하는 별점 수치와 상단 노출을 향한 계산 사이에서, 나는 종종 내가 만든 공간에서 길을 잃는다.


효율은 분명 중요하다. 그러나 효율이 유일한 이유가 되는 순간,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편집된 경로 위를 빠르게 달려갈 뿐이다.


오늘도 나는 카페를 열고, 원두를 갈고, 음악을 튼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켜서 어젯밤의 리뷰를 확인한다. 이 아침의 어느 만큼이 나의 의지이고, 어느 만큼이 시스템에 의해 교정된 결과물인지 정확히 모르겠다. 다만 그 질문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질문을 멈추는 순간, 나는 내가 주인인 줄 알았던 이 열두 평 공간에서 완전히 편집된 하루의 부속품이 되어버릴 것 같아서.


“지금 이 선택은, 정말 나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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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의 '자발적 피편집자'는 싱코그래피에서 ‘사유’에 해당하는 철학적 에세이로, 앞서 다룬 ‘삶’에 대한 철학적 주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철학적 사유까지 읽고 싶지 않은 독자라면 이 부분을 건너뛰어도 무방합니다. 읽지 않더라도 앞서의 글을 통해 필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본래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는 특별한 어려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유에 대해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요한 독자라면 한 번쯤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자발적 피편집자


- 우리는 어떻게 자신의 현실을 교정하는가


철학은 늘 낯선 곳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광장에서, 몽테뉴는 서재에서, 파스칼은 방 안에서 사유했다. 만일 내가 카페를 운영하는 사람이라면, 오늘 나의 사유도 카페의 카운터 뒤에서 시작되어야 할지 모른다. 원두를 갈고, 별점을 확인하고, 알고리즘의 노출 로직을 공부하는 그 자리에서.


한 카페 사장이 이런 질문을 품는다. 퇴근길에 배달 앱으로 다른 카페의 커피를 주문하고, 앱이 추천한 순서대로 스크롤을 내리다가 '가장 많이 팔린' 메뉴를 고르면서 문득 멈춘다. 나는 지금 내가 마시고 싶은 것을 마시는가, 아니면 알고리즘이 내 입맛이라고 규정한 것을 받아들이는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왜 또다시 알고리즘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이 구분 불가능성이야말로 우리 시대 자유 의지 논쟁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 논쟁은 더 깊어질 것이다.


자유의지의 전통적 논쟁은 언제나 외부의 강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결정론자들은 인과의 사슬이 우리의 선택을 이미 규정한다고 말했고, 자유의지론자들은 그 사슬을 끊을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 오래된 논쟁은 한 가지를 전제했다. 강제와 자발이 구분 가능하다는 것. 족쇄는 보이고, 감옥은 느껴진다는 것.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구조는 그 전제를 아무도 모르는 순간 해체하고 있다.


알고리즘은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 명령하지도 않는다. 다만 배열만 할 뿐이다.


무엇이 먼저 보이는지, 무엇이 반복되는지, 무엇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지를. 그 배열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느끼며, 실제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지갑을 연다. 강제의 흔적이 없기에 저항의 근거도 흐릿하다. 이것이 푸코가 말한 규율 권력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른 지점이다. 근대의 규율은 신체를 통제했지만, 알고리즘의 통제는 욕망 자체를 재배치한다. 나는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원하도록 설계된다.


여기서 핵심적인 철학적 문제가 발생한다. 진정성(authenticity)의 문제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세계 안에 던져진 존재임을 말했다. 우리는 언어, 문화, 역사라는 조건 속에 이미 놓여 있으며, 그 조건을 완전히 벗어난 순수한 자아란 없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본래적 실존'의 가능성을 말했다. 던져진 조건을 직시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것으로 떠맡는 선택. 그 직시와 떠맡음이 진정성의 조건이었다.


문제는 알고리즘이 그 직시를 방해한다는 데 있다.


카페 사장이 자신의 공간을 플랫폼의 형식에 맞게 편집하고, 별점 수치를 확인하며, 노출 로직을 공부할 때, 그는 자신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고 있다고 느낀다. 틀리지 않다. 그러나 그 선택이 반복될수록 처음의 이유, 원두의 향이 좋았고 사람들이 잠깐 쉬어가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그 마음은 점차 배경으로 물러난다.


결국 효율이 앞으로 나오고, 의미는 뒤로 밀린다. 이것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을 적응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적응이 쌓여 방향을 잃을 때, 하이데거의 언어로 그것은 퇴락(Verfallenheit), 즉 세상 속으로 흩어져 자기를 잃는 상태와 다르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기기만이다.

사르트르는 나쁜 믿음(mauvaise foi), 즉 자기기만을 인간 실존의 근원적 유혹으로 보았다.


우리는 자신의 자유와 책임이 불안하기에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 한다. "어차피 대안이 없잖아", "나 하나 안 쓴다고 뭐가 바뀌겠어." 이 말들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구조에 떠넘기는, 자유의 포기를 자유로운 판단처럼 포장하는 행위다. 그리고 사르트르의 눈으로 보면, 그 포장이야말로 가장 정교한 자기기만이다.


카페 사장의 질문은 이 지점에서 날카로워진다.


"이건 내 생각인가, 아니면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하는 가장 조용한 Correction인가."

b00818ab-9c00-445d-bf83-a43d35ff16a9.png by ChatGPT

‘Correction’, 교정. 이 단어는 영국 드라마 《더 캡처》에서 국가 정보기관이 CCTV 영상을 실시간으로 편집하는 시스템의 이름이다. 타인의 현실을 조작하는 외부 권력의 이름이었던 그것이, 이 에세이에서는 방향을 바꾼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가하는 교정. 불편한 진실을 보지 않기 위해, 선택의 무게를 느끼지 않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인식을 매끄럽게 다듬는 과정이다.


외부의 Correction은 저항할 수 있다. 조작자가 보이면 맞설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에게 가하는 Correction은 저항의 주체와 대상이 같다.


형사가 진실을 알고도 폭로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알고도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그 '알고도'를 점차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듬어 버린다. 이것이 이 시대 자기기만의 새로운 형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글은 플랫폼을 떠나라고 말하지 않는다. 알고리즘에 저항하라고 촉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한 가지를 말한다. 질문을 포기하지 말 것. 카페 사장이 오늘도 별점을 확인하고, 노출 로직을 계산하면서도 "이 아침의 어느 만큼이 나의 것인가"라는 질문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처럼.


철학의 역할은 정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 보여주듯, 철학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직시하지 않던 것을 꺼내는 작업이다. 그 작업은 불편하다. 나의 선택이 온전히 나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정면으로 보는 일은, 자아의 확실성이라는 가장 익숙한 위안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흔들림이 시작되는 자리에 비로소 진정한 질문이 놓인다.


“나는 지금 무엇을 원하는가? 그 원함은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그 원함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떠맡기 위해, 나는 오늘 무엇을 직시할 것인가?”


효율은 방향을 묻지 않는다. 의미만 묻는다. 우리가 편집된 경로 위를 빠르게 달리면서도 이 질문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자발적 피편집자가 아닌, 자신의 현실을 스스로 저술하는 존재에 조금 더 가까워진다.


지금 이 선택은, 정말 나의 것인가.

이 질문을 오늘도 손에 쥐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시작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묻고 싶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은 정말 당신의 선택일까, 아니면 이미 내려진 선택을 따라온 것일까?"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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