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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퇴사자의 여름

인생: 여름을 보내는 중입니다.

by 달빛기차

나는 숲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여름의 숲길은 선물 같다.

여름을 반기는 새의 지저귐과 더위를 피해 산을 찾아온 바람이 나뭇잎에 ‘사사삭-사사삭-‘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면, 더위조차 달갑게 느껴진다. 짙은 녹음에 뜨거운 태양도 힘을 잃는 숲 속을 걷다, 문득 이 길이 지금의 내 인생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인생은 사계라고 한다.

봄에 태어나, 여름엔 열정으로 삶을 일구고, 가을에 수확하여 추운 겨울에 찾아 올 긴 동면을 준비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은 사계처럼 흘러간다면 나는 지금 어디쯤 왔을까?


가을을 목전에 둔 여름일까? 아니면 아직은 가을까지 여유가 있을까?

가을이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다가올 수확만을 바라보며 사는 여름의 농부일지도 모르겠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더위도 잊고 농사일에만 매진하는 농부, 그게 나일지도.

그렇다면 나는 지금, 수확물을 온전히 키워내려 하고 있다.


매일 같이 끝간 데 없이 하늘만 향하는 풀을 시간의 낫으로 베어 냈고,

메말라 먼지가 되어 흩어지는 땅을 마음의 땀으로 적셔 주었다.

그리고 시들어가는 잎들을 위해 온전한 나를 비료로 내어준다.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 우리들은 이 뜨거운 여름에 무엇을 키워내고 있는 걸까?

우리는 모두 농부가 처음이라, 누군가 알려주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자신이 땅에 뿌린 씨앗이 무엇이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도 모른 채, 그저 수확의 기쁨만을 상상한다. 마치 결승전만 향해 달리는 경주마인양, 농부의 눈에는 오로지 여름만 비쳐졌다.

누가 그의 시야를 차단했을까?

잠시 자라나는 작물을 바라보며, 생각이라도 하려하면 가을이 숨막히게 쫓아온다. 손목의 시계를 두드리듯, 시간이 없다고 재촉당한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다.

가끔 여름이 선사하는 서늘한 바람을 가을의 꽁무니라 생각하고, 아직 지지 않는 열매 꽃을 애끓게 바라본다. 가을이 재촉한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열매 꽃이 떨어지는 것을 기다리며, 열사병이 오는지도 모르고 땅을 일군다.


dreamina-2025-07-21-7710-뜨거운 여름 땅만 보고 농사지는 농부. 농부는 단발머리여성이고 옷은 먼지....jpeg @CapCut생성

푸르른 여름이 선물한 상자를 하나도 열지 않은 채 땅만 바라보던 농부는, 창공을 가르는 새소리에 고개를 든다.

‘핑-잉’

농부의 세상이 힘없이 흔들렸다. 농부는 그제야 흐려진 시야 사이로 시리도록 청아한 하늘을 봤다. 광활한 그곳에는 파랑새 한 마리가 위험을 경고하듯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농부가 쫓으려던 새다. 창공을 활공하는 새를 넋 놓고 바라보다, 다시 세상이 돌고 몸이 휘청거렸다.


아직 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 풀도 베야 하고, 비료도 줘야 한다. 조금 더 힘을 내려 낫을 들었지만, 파랑새가 빠르게 날아와 ‘툭’ 치고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몇 번을 반복하자, 그제야 농부는 인정했다. 그래, 쉴 때다.

힘이 빠져서 휘청거리는 다리를 끌며, 시원한 그늘을 찾아 숲으로 들어갔다.


‘그래… 좀 쉬자. 휴-우. ‘

잠시 숨을 돌린 농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름을 오롯이 보내 웅장해진 나무들이 숲에 짙은 어둠을 만들었고, 농부를 다독이던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숨겨버렸다. 그리하여 적막이 찾아왔다.

열기에 타들어가던 열정이, 적막에 사그라들자 뜨겁던 몸은 서늘하게 식어 잘게 떨려왔다. 그리고 떨림만큼의 두려움이,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가 듯 발끝부터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 갔다.


‘다시… 나갈까?’

농부는 두려운 마음에 자신의 농지를 바라봤다. 여름이 분노한 듯, 화산처럼 불붙은 태양은 작은 틈도 주지 않고 모든 땅을 데워버렸다. 그리고 주인의 손길이 사라지자,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흩어지는 먼지 사이로 작물들도 하나 둘 쓰러져갔다.

그곳은 더 이상 농지가 아니었다.

농부는 사라져 가는 ‘노력’의 여름을 속절없이 바라봤다. 돌아갈 용기는 흩어졌고 마음도 접혔다. 열매 꽃이 지는 속도보다 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숲길을 바라봤다. 이제 이 길만 남았다.

‘… 하-아, 끝이 있긴 한 거야…?’

농부는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이곳이 자신의 가을 같아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막막한 '어둠'의 공포를 이겨내려 접힌 마음을 재촉했지만, 오히려 더욱 구겨졌다.

마음과 함께 더 구겨진 자존심이 농부를 ‘겁쟁이’라고 무시하며, 자존감을 깎아내렸다. 자신이 구겨진 것보다 더.

농부는 아직 떨림이 남은 다리를 주먹으로 깨우며, 아름드리나무를 붙잡고 한 발 앞으로 내디뎠다. 두려움을 안겨준 나무에 기대어 내딛은 한 발은, 뻘 위에 선 것처럼 무겁고 힘겨웠다. 농부의 무너진 자존감은, 앞에 펼쳐진 숲을 괴물의 입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입안에 거미줄이라도 생긴 듯 사방으로 뻗은 나뭇가지들이, 금방이라도 그를 옭아매어 목구멍 안으로 던저버릴 것 같았다.

‘… 어떻게 가야 해… 이렇게 무서운데… ’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싶어졌다.


KakaoTalk_20250721_173600303_01.jpg 선물 받은 아이

하지만 농부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 농부가 되었을 때 선배가 해준 말이 그의 신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울면 안 돼, 힘들어도 참아. 버티는 자가 이기는 거야.”

따뜻한 용기를 건네며, 농부를 다그친 그 말로 지금까지 여름을 버텨왔다. 다시 버텨야 한다.

농부는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달래며, 다리를 다독였다.

“가자, 어디든 여기보다 나을 거야.”


한 발, 한 발, 두 발은 안 됐다. 오로지 한 발, 한 발.

그렇게 걷다 보니, 길이 보였다. 떡대같이 앞을 가로막던 나무들이, 농부의 용기를 칭찬하듯 작은 빛을 허용했다.


다시 한 발, 한 발.

땅만 보며 앞으로 나가던 농부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먼지처럼 흩어지던 자신의 농지의 안부가 걱정돼서. 어느새 아득히 멀어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더 이상 먼지는 없었다. 뜨겁던 태양도 어느새 정오를 지나 인자하게 얼굴을 바꿨다.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쩐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다른 농부가 땅을 일구는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곳은 그의 농지가 아니었다.

농부는 허탈하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한 발, 한 발. 어쩐지 가벼워진 발걸음은 이제 두 걸음씩 걸을 수 있었다.

아직은 든든한 나무에 의지해야 하지만, 이제 저 멀리 또 다른 농지가 보인다.

결국 길이란 돌고 돈다.

어디든 다시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길이란 것을, 농부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조금 더 용기가 났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새로운 농지를 만날 것이다. 그럼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자, 힘이 났다. 씩씩하게 다리를 들어 올리던 순간.


“뭘 심지? 뭘 키워야 하지?”

다리가 ‘툭’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기분 탓인지 길이 질퍽해지고, 농지는 너무 가까워졌다.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농부는, 새로운 농지 앞에 숨이 막혀왔다. 다시 숲속으로 돌아가고 싶어 졌다.

‘그래 돌아가는 거야, 아직 난 열이 내리지 않았으니까, 쉬어야 해’

몸을 돌려 돌아온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빠르게 걸어가자, 농지가 마음만큼 멀어졌다.

왜였을까, 어두운 숲을 벗어나고 싶던 농부는 이제 농지를 외면하고 싶었다.

‘버티면 되는 거야… 버티면… 정말? 이길 수 있어?’

농부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엇이 이기는 걸까? 그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질문을 던져봤다.


dreamina-2025-07-21-3846-어두운 숲속. 빛 한 점 보이지 않는다. 아름드리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jpeg @CapCut생성

여름의 농부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새로운 농지로 갔을까? 아직도 숲에 머물고 있을까?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중간 어디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인생이니까.

맹목적으로 가을의 수확에 매달리던 농부에게 ‘무엇’이라는 질문이 생기는 순간, 그의 여름은 달라졌다.

‘무엇’을 수확할 것인가.

지금 농부는 그 고민 중일 것이다.

여름의 안대를 벗고, 이모작을 노리거나 땅에 잠시 휴지기 주겠다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수확하길 바라는 가이니까.

아주 긴 시간이 걸려도 괜찮다.

선선한 가을을 만나기 전까지, 여름은 열심히 산 농부를 기다려 줄 테니까.


여름 농부인 나는,

숲길을 걷는 것을 좋아하는 퇴사자다.

숲은 내 인생이 아니란 것을 안다. 이곳은 삶의 작은 휴식처이다.

이 휴식이 끝나면, 나는 또 나의 길을 갈 것이다.

그때까지 여름이 선물한 상자를 하나씩 열어보면서.

“고마워 여름아”



dreamina-2025-07-04-7794-컴퓨터에 글을 쓰는 뒷모습. 모니터에는 에세이가 작업중이다. 책상 옆에는....jpeg @CapCut생성



ps. 모든 이미지는 AI가 생성했으나, 화자를 모티브로 하지 않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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