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1. 어제와 같은 오늘
※ 이 에세이는 글쓴이의 경험에 픽션이 가미된 팩션(faction)입니다.
“위이잉-위이잉-“
출근 준비를 알리는 알람이 울리면, 꿈에서 깨어난다. 신기하지만, 이 순간 꿈은 손 안의 모래처럼 흩어진다. 꿈을 꿨다는 기억만 남고, 모든 것이 흐릿해진다. 아침의 분주함이 늦지 않도록 기억을 잡아 채 숨기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짧은 생각조차 여유가 없다. 출근까지 2시간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마음속 출근 준비 리스트를 빠르게 지워간다.
수면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화장은 포기한 지 오래다. 하나의 동작으로 씻고 옷을 입는다. 가방을 들고 도어록을 누르면, 발끝부터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한 선득한 느낌이 든다. 무언가 두고 온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려서 집안을 돌아본다.
‘핸드폰 챙겼고, 가방 챙겼고, 양말 신었고…’
평소 자주 잊는 목록을 다시 체크한다. 역시 오늘도 완벽했다, 허탈하게 ‘피식’ 웃음을 지으며 문을 닫았다. 언젠가부터 한 번씩 실수한 일들을 불안해한다. 다시 반복할까 봐. 그 불안이 바쁜 출근길에 발목을 잡는 것이다. 덕분에 3분 뒤 도착하는 마을버스를 타기 위해 뛴다. 놓치면 지각하므로, 심장이 깨어질 정도로 전력질주한다.
마을버스는 이미 만두의 속처럼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럼에도 직장인의 분노처럼, 더 이상 들어갈 자리가 없는 곳까지 꾸-역꾸-역 눌러가며 한 명 더 올라탄다. 한 명 더, 한 명 더, 끝나지 않고 올라온다. 온몸이 사람에 짓눌려 숨쉬기 어려운 순간이다. 출퇴근 시간의 마을버스를 올라타면, 늘 이 같은 풍경이 벌어진다.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작은 안도를 한다. 내가 다르지 않음을 느끼며, 다들 그렇게 살아가는 거다. 다들 출근을 위한 지옥길에 올라탄다. 다들 회사원이란 이름으로.
지옥길 위에서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내고, 정해진 시간까지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하루가 시작된다. 어제와 다름없는 업무와 회의들로 점철된 시간을 보낸다. 그러면 어제와 다른 동료가 찾아와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사한 마케팅부의 홍보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또 누가 떠났구나 싶지만, 흔한 이별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 아쉬움은 남지만 인사 없이 떠난 동료는 다시 만나도 기억 못 할 사람이므로.
“반가워요. 저도 잘 부탁드려요.”
냉랭함이 없기를 바라며, 굳어진 얼굴 근육을 남몰래 풀어본다. 얼굴에 자리 잡은 회사원의 주름 길이 자연스러운 비즈니스 매너를 불러온다. 언제 다시 떠날 사람일지 모르므로.
적자생존 속 세상에 찾아온 아기 새를 돌볼 여유 따위는 없으므로. 알아서 살아남길 바란다.
“과장님, 우리 언제 점심이나 같이해요~”
“좋죠.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그래요. 그럼 조만간 연락드릴게요~!”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하고 떠나는 김 팀장을 바라보며,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한다.
‘아, 지난달에 저녁 먹자고 했었지.’
다시 모니터로 돌아간 시선은, 방금 떠오른 생각마저 지우고 일에 몰두한다. 2시를 향하는 작은 시곗바늘이 시간을 반으로 접길 바라며. 사무실은 다시 적막 속에 키보드 소리만 울린다.
“타다닥-타다닥-타닥-타닥닥-타다닥-타닥”
뻐꾸기시계 없이도 모두가 아는 그 시간이 되면,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눈치 싸움이 없어진 것이 다행인 문화. 일이 발목을 잡는 것 여전한 문화. 접히길 바라던 시곗바늘이 역행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유영한다. 오늘 중으로 보고가 되어야 하므로.
나는 오늘 보고하고, 상사는 내일 아침에 보는 묵은지 같은 보고서. 곰삭은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내 취향이 상사와 같을 수는 없으므로, 묵묵히 일을 해낸다. 야근은 여름이 좋다. 아직도 세상을 비추는 태양 덕에 퇴근까지 시간이 남아있는 것 같으므로, 야근 같지 않다.
아침 길을 되감기 하듯 집으로 돌아간다.
“띠리리-철컥”
아침의 걱정은 기우였듯 놓고 간 것은 없었다. 사실 놓고 가도 큰 문제는 없다. 핸드폰 정도는 상사를 불편하게 하겠지만, 그 또한 내 불편은 아니므로.
화장을 하지 않은 탁월한 나의 선택을 칭찬하며, 세수를 한다.
‘흠… 났군’
얼굴에 난 뾰루지를, 무심히 바라본다. 오늘도 사무실 공기는 탁했고, 인스턴트 도시락은 맛이 없었다. 뾰루지도 태어날 때가 됐다. 저녁을 삼각김밥으로 마무리하면, 녀석과 나는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래도 괜찮다. 짜버리면 되니까.
막 태어난 녀석을 매몰차게 짜내고 자리에 눕는다. 어두운 천장. 하나, 둘, 셋, 넷…
‘억울한데…’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하루, 또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사무치게 억울함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이럴 때는 핸드폰이 답이다. 옆으로 돌아누워 푸른 불빛에 의지하며, 빨간 상자를 연다. 먹방도 좋고, 여행도 좋고. 아니 오늘은 여행이 좋다. 오늘의 기억은 어두운 천장 대신, 오로라로 장식하리라. 열 시, 열한 시, 열두 시, 한시… 몽마의 자개농이 찾아온다.
또 그 꿈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잊어버릴 꿈.
꿈인 것도 잊고 다시 아득하게 빠져든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으면, 찰랑이는 바다 사이에 길이 나타난다. 그 길 끝에는 검은색 자개농이 놓여 있다. 안에는 또 누군가 있을 것 같았다. 매번 그랬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어디서 본 듯한 자개농을 찾아 길을 떠난다.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끌림을 따라 길을 걷는다. 아무리 걸어도 줄어들지 않는 거리를, 출근보다 더 힘들게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마음이 지쳐간다. ‘포기할까? 가지 말까?’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가지 말아야 할 이유들만 마음에 나열된다. 그래도 어쩐지, 이번에는 포기하면 안 될 듯해서. 괜스레 오기 부려본다.
‘저 속에 그 아이가 있었으니까…’
문득 떠오른 하나의 이유. 가야 할 까닭을 찾자 갑작스레 거리가 좁혀졌다. 눈앞에 신기한 자개농이 서있었다. 어느새 떠있는 달빛을 받아서 은은하게 빛나는 자개농 하나.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자개로 만든 학을 쓰다듬어본다. 달빛을 받아서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시리게 한다.
‘너였구나…’
기억났다. 어린 날 할머니의 보물, 나의 놀이터. 나는 섭섭지 않도록 거북이도 쓰다듬었다. 어린 시절 이름을 붙여줬던 학과 거북이, 십장생의 모든 아이들이 여전했다. 빼꼼히 열린 작은 문틈도.
천천히 틈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어볼까 생각했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았다. 책임지지 못할 일은 하면 안 되므로. 문틈으로 시선만 담았다. 틈으로 들어가는 달빛이 전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창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하지만 안에서는 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웅크리고 무엇을 하는 아이의 작은 듬직한 등이 보였다.
‘누…구…?’
입이 달싹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부르고 싶지 않았다. 부르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때 아이가 고개를 돌렸다.
“안녕?”
‘나…. 나였니?’
기억났다. 자개농 속 아지트를 사랑하던 나, 넌 아직도 그곳에 있었니? 나는 이미 너무 커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에, 또 다른 내가 있었다. 나를 마주하니, 문을 열고 싶어졌다. 그러나 세월에 뒤틀린 나무 문은 쉽사리 아이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이는 그런 나를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 내지 않고 말을 전했다.
[왜 그래? 문은 왜 열어?]
그러게 왜 열지?
[나를 찾은 거야?]
그러게 너를 찾은 거니?
“이젠 내가 필요해?”
아이가 다시 말했다. “응”이란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너는 왜 그곳에 있고 나는 왜 너를 잊었는지 모르니까.
다시 아이가 누군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이 흩어진다. 아이는 다급한 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커버린 내 손이, 틈새로 아이의 손을 향해 다가갔다. 고사리 같은 손에는 붉은빛이 아름다운 작은 구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어린 날 내가 가지고 놀던 유리구슬.
“오늘도 이겼어! 혼자서도 이겼어~!”
길 위의 아지랑이처럼, 아련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모든 장면이 색 빛을 잃고 손끝부터 서서히 흩어졌다. 손안의 빨간 구슬만 남긴 채.
“위이잉-위이잉-“
출근 준비를 알리는 알람이 울린다. 다시 꿈에서 깨어났다.
낯설게도 꿈은 손 안의 모래처럼 흩어지지 않았다. 밤새 꽉 지고 있었는지 저릿한 손을 펴보았다. 손바닥이 움푹 눌린 것이, 정말 붉은 유리구슬이 놓여 있었던 것 같았다. 왈칵 올라오는 꿈의 기억에 마음이 멈칫했다.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왜 나는 아직도 그 작은 아지트에서 혼자 있을까… 혼자서도 재미있게…
“위이잉-위이잉-“
끄지 않은 알람이 재촉한다. 더 늦기 전에 출근 준비를 해야 한다. 조금만 더 생각하고 싶지만, 현실을 살아야 하므로. 지각의 생각보다 출근을 선택한다. 회사원의 본분은 정시 출근이므로.
일상 속에서 꿈은 잊힌 것을 알지만, 생각을 뒤로 미룬다. 허탈한 마음에 손을 계속 바라보고 싶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쥐었다 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 세수를 끝내고 바라본 거울 속에 있는 내가 낯설다. 오늘은 화장을 하기로 한다. 민낯의 내가 덜 낯설도록.
“때구르르르”
“잊어도 돼. 난 언제나 여기 있어. 그러니까, 조급해하지 마. 언젠가는 우리는 반드시 만날 테니까”
“그럼 됐어.”
[Part2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