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만났어요. 나예요.
퇴사를 결심하고, 바로 염색을 멈췄다.
내 흰 머리카락 염색의 시작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에는 2개월에 한 번씩 앞마당에 내려 앉은 눈을 치우기 위해 뿌리 염색을 했었다.
앞마당에 내리던 눈은, 어느새 폭설 경보를 발령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하는지. 전날 회사에서 상사의 천둥번개라도 맞으면, 머리카락에 마음이 옮겨 간 것처럼 눈이 더 쌓였다. 스트레스 기상청이다.
그리고 소복이 눈을 안 치우면 듣는 말이 있었다.
“눈이 많이 내렸네요” 혹은 “눈 안 치우세요?”
눈 치우는 것이 귀찮지만 ‘말’이 더 귀찮았다. 눈을 안 치우는 것이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관리’의 영역으로 비칠까 걱정했다. 그래서 소심하게 염색을 선택해왔다.
그런데 염색을 하는 것도 두 가지 이유로 어렵다. 첫번째는 돈이 많이 든다.
한 번은 네임드 미용실에 간 일이 있다. 그날따라 동네 미용실들이 모두 문을 닫거나, 손님이 많아서 부득이한 선택이었다. 보통 동네에서 염색 가격이 3~7만 원선이라서 별생각 없이 염색을 했다. 그리고 계산하는 순간
“15만 원입니다.”
‘헉…미친’
“여기요.”
속내야 어떻든, 웃으면서 바들바들 떨리는 핸드폰을 내밀었다. 손을 안 떨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쿨한 척했지만, 속으로는 15만 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100가지쯤 생각하는 질척한 손님이었다.
긴 머리 염색이었으니, 디자이너 선생님들의 수고로움과 염색약을 생각하면 비싼 것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가치 기준 선에서는 비쌌다. 난 미용이나 패션에 그다지 돈을 쓰지 않는 편이다. 그러니 15만 원의 가치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그 뒤 난 동네 실력 ‘네임드’ 디자이너 선생님들만 찾아다닌다. 그럼에도 두 달에 한 번씩 몇 만 원을 써야 하니 너무 아까워 미루고 미루다 방문했었다. 차라리 그 돈으로 우리 개 딸 목욕 비용으로 썼다면, 내 몸이 편했을 것이다. 시바견을 집에서 목욕시키면 털 날림의 전쟁이니까.
두번째는 독한 염색약이다. 염색약을 바르고 한 시간 정도 앉아있으면 눈이 시려서 눈물이 난다. 좋은 약을 써도 토깽이 눈이 된다. 그리고 두피 손상도 심해서, 머리카락이 가늘어지고 빠진다.
그럼에도 멈출 수 없었던 일을, 퇴사를 기점으로 작별했다!
주기적으로 하던 염색을 멈추니, 내가 더 잘 보였다. 그래서 요즘 거울 속에 낯선 여성과 친해지는 중이다.
‘헉…누구세요?’
어느 시인의 시처럼, 매일 새로운 사람을 보는 재미는 있다. 내게 내려앉은 세월의 무게가 낯설면서도 신기하고, 대견하다. 그래서 놀라지만, 반갑다고 인사하고 나온다.
예쁘지 않다는 것은 함정이고. 낯선 것은 내가 나를 돌아봐주지 않은 것 같아서, 약간은 서글프기도 하다.
그리고 조금의 걱정이 하나 있다. 흰머리가 세월의 무게가 아닌, 초라함으로 비칠까 봐.
며칠 전 무거워진 머리카락과 결별을 선언했다. 숏커트!
미용실을 나서며, 이미 봤지만 그래도 다시 궁금함에 카메라를 꺼냈다.
짧아진 머리카락이 내 얼굴과 어떤 조화를 이루는 가! “찰칵!”
두근대는 마음으로 확인하는 순간, 심장에서 버려진 토깽이 한 마리가 뛰어나와서 핸드폰을 집어던질 뻔했다.
“누구세요?”
그곳에 할머니 한 분이 계시는 거 아닌가? 앞머리에 소복하게 눈을 쌓아두신 할머니가 어색하게 웃고 계셨다. 하필 옷도 빨간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당장 메신저로 지인한테 사진을 보냈다. 좋은 것은 공유하라고 배웠으니까!
“숏커트했어요.”
“하하하 덕분에 웃었어”
그럼 됐다. 그렇게 세 사람을 웃겨줬다.
아무튼 숏커트가 되니 앞마당에 치우지 않은 눈들이 과한 자의식을 보였다. 의식되게.
머리카락 한 가닥에 아쉬움, 한 가닥의 섭섭함을 담으며 고민하던 차에, 우연히 지인을 만났다.
“어머, 머리는 왜 그렇게…”
“하하하, 퇴사 기념이요”
“그렇구나.”
“그런데 앞머리에 흰머리가 잘 보여서 고민이에요.”
제 발 저린 도둑은 별말 없이 넘어가길 바란다. 제발…
“염색 안 하셨어요?”
“네, 퇴사하고 일부러 안 하고 있어요. 앞으로 안 할까 해요.”
“괜찮지 않을까요? 어디 가시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지, 회사는 안 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그런데, 어디 가면 안 되나?’란 생각도 들었다. 결국 이게 걱정인 것이다.
‘타인의 시선’
난 더 이상 염색을 하고 싶지 않다. 이대로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좋다. 내가 살아온 세월 같아서. 내 고생을 알아주는 것 같아서. 오히려 좋다. 그런데 나의 내면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니 계속 갈등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며 산책을 하다 또 다른 지인을 만났다.
“어어어!!”
삿대질 안 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반응이었다. 그만큼 짧게 자른 상태였다.
“헤어졌어요? 이별?”
“이 나이예요? 이별했다고 머리카락 자를 리가”
쿨내 나게 말했지만, 닥치지 않은 일은 확신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원래 숏커트 좋아해요. 회사 다니면 못하니까, 쉴 때 해봤어요.”
“왜 못해요?”
“말이 많아서요.”
“그래서요?”
‘그러게 그래서?’
그 순간 생각했다. 결국 모든 고민의 결론은 ‘나’다.
타인이 안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내가’ 안 괜찮은 것이었다. 내가 괜찮으면 된 것 아닐까? 나만 당당하면 되지 않을까?
물론 내가 당당하다고, 모두 통용되지는 않는다.
강사 일을 할 때, 강의가 없어서 조금 편안한 복장을 하자마자 TPO로 말을 들은 일이 있었다.
“강사가 복장이 그게 뭐야. 모범이 되어야지.”
“하하하… 네!”
팀장 되자마자 바꿨다. 강의실에 들어갈 때만 지키고, 평소에는 조금은 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TPO가 중요한 것은 맞다. 그에 맞는 이미지라는 것이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시선’의 문제라기 보다 ‘예의’의 영역이다. 강의할 때 든 예시로 말하면, 강사가 녹색 트레이닝에 삼선 슬리퍼 질질 끌고 들어와서 “여러분 안녕하세요! 지금부터 직장 내 예의에 대해서 강의 하겠습니다”라고 하면 수강생들이 무슨 생각을 할까?
그러니, 강의 내용에 맞춰 복장을 맞추고 자세를 바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 ‘흰 머리카락’은 포함되지 않는다. 수강생은 앞선 복장은 ‘뭐야?’라고 신뢰를 주지 않겠지만, 후자는 ‘이번 강사님은 연세가 있으시구나’라고 생각할 뿐이다. 혹은 아무 생각 없거나?
그리고 요즘은 오히려 ‘고잉그레이’라는 문화도 있다. 나에게 생기는 변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수용하여, 염색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퇴사와 무관하게 염색 안 해도 된다. 당당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당당하기 쉽지 않다. 당당하려면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썩 어울리지 않는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 같고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주춤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말’로 나를 설득해 봐야 의미가 없다. 이런 마음으로 ‘당당’하라고 설득이 될 리가.
당당하려면 아주 오랜 시간 자리 잡힌 자신만의 가치관과 신념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이덕화 선생님처럼.
이덕화 선생님은 가발을 쓰셨지만, 작품(5공화국)을 위해 과감히 가발을 벗어던지셨다. 그뿐인가? 배역에 동화되기 위해, 머리를 밀고 다시 가발을 붙이셨다고 한다. 어떤 마음이셨는지 내가 감히 짐작할 수 없지만, 최소한 배우로서 신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신념의 결과는 멋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단순한 당당함이 아니라, 그 안에 든 ‘신념’이란 생각이 든다.
만약 내게 정말 신념이 있었다면.
“하하하 외출할 때 염색하죠” 같은 자조적인 말 대신,
“하하하 저 자주 돌아다니는데, 멋지지 않아요?”라고 말했을 것이다.
아니 애초에 “염색을 안 해서”란 말 따위를 꺼내지 않았을 것이다. 불필요하니까.
결국 염색의 불편함은 가지고 있고, 하기 싫다는 욕구는 생겼지만 신념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설프게 고민하고 주춤주춤 “괜찮을까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갈등 중이란 이야기다. 뭐든 양가감정이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좀 더 옳거나 편한 쪽으로 결정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지금 내게 편한 것은, 지금까지 내 성격상 그냥 염색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 염색이 싫다면 신념을 세우면 된다. 왜 그것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잃거나 얻을 것을 받아들이며 된다. 그렇게 어떤 바다에서도 쉽게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크루즈선처럼. 설사 그게 나라는 변덕의 폭풍이 친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신념을 새기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나의 가치와 신념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염색을 할지 말지는 그 뒤에 결정해도 된다. 타인의 눈치를 보며 물을 것이 아니라. 타인이 하란다고 하고, 하지 말란다고 안 할 성격도 아니지 않는가?
그리고 생각해 보니 나도 그런 ‘말’을 많이 했다.
“어머, 흰머리가 많네요. 요즘 많이 힘드시죠?”
그만하자. 역지사지 좀 하는 걸로.
P.S 편편아, 앞마당에 눈 왔다. 엄마는 힘드니 너 혼자 뛰뛰하고 오렴~.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