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했다고 말하지 못한 이유
“저 퇴사했어요.”
이 말이 내게는 너무 소중하고 달콤하다. 그만큼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 도달한 결론이었고, 지금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의 퇴사를 지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다. 그러기에 온 세상에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퇴사했다고. 퇴사자라고.
물론 열심히 일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 다시 쭈그러진 캔이 되지만. 한 번뿐인 내 인생이니까 이번만큼은 비교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왜! 그 순간에는 아무런 말도 못 했을까? 벌들 앞에서 꿀 먹다 들킨 입술처럼, 꾸-욱 다물고 ‘퇴사’란 단어는 모르쇠 하고 싶었을까. 그날은 ‘퇴사’란 단어만 목구멍에 가시처럼 걸려서 마음까지 ‘캑캑’ 거렸다.
며칠 전 퇴사로 유쾌해진 마음으로,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러 갔다.
회사를 다닐 땐 마음이 천근 같아서, 몸이 잘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서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었다. 짧았지만, 기쁨과 설렘만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헤어지는 길에 동생이 해맑은 표정으로 질문했다.
“언니, 그런데 오늘 회사 쉬는 날이야? 어떻게 낮에 이렇게 다 왔어.”
“어? 아… 아니”
눈앞에 곤충이라도 나타난 듯 잡지 못하고 움찔거렸다.
“연차야?”
“… 아니…”
‘아니… 퇴사했는데… 왜 말이 안 나와…’
“아! 반차?”
“아… 아니…”
그만 물어봤으면 했지만, 아직도 더 남은 휴일이 있었다. 이건 직장 다닐 때도 헷갈렸다. 연차, 월차, 대휴, 반차, 반 반차, 창립기념일, 전사 휴무 등 쉬는 건 좋은데 너무 종류가 많다. 쉬는 건 좋은데 챙기기 어려운 휴일 종류다.
“그럼?? 회사 쉬는 날이야?”
“아니, 나…”
숨을 한 번 고르고.
“퇴사했어. 지금 쉬어.”
순간 1초의 정적이 흘렀다. 마음의 시간은 수십 년이 흘러가는 듯했다.
‘왜 말이 없는데? 말을 하란 말이야!!’
하필, 정말 하필… 내가 방문한 날이 평일 낮 시간이었다. 그래서 동생도 별생각 없이 한 질문이었다. 사실 첫 질문에 그냥 “응”이라고만 했어도 됐다. 쉬는 거 맞으니까. 오늘만 쉬는 것이 아닐 뿐이지. 그럼 질문한 동생도 마음 편하게 작별 인사했을 것이다. 그놈의 진실병이 도져서 기어코 문제를 만든 것이었다. 쓸데없이 도지는 진실만 말하는 체질이 늘 문제다.
“… 그럴 수도 있지…”
순간 그 말에 다시 곤충 한 마리가, 튀어나와서 마음이 넘어진 느낌이었다. 와장창 금이 갔다.
무언가 잘 못이라도 했는데 이해받는 것 같았다. 살다 보면 일이 잘 못될 수도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마음의 돌부리 같은 자격지심이다.
안다. 아무짝에 쓸데없는 마음이란 것을 잘 안다.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곳에 있으면 더 금이 간 마음이 완전히 부서져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묻지도 않은 인사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하하, 다른 시작하려 준비 중이야!!”
안물안궁이다. 나오면서 속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응, 이제 회사 쉬어. 관뒀거든.”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곤충을 찾듯, 허공에 손짓 발짓을 하며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다.
며칠 전만 해도 퇴사자가 좋다고 그렇게 희희낙락했는데, 그 순간은 마음이 쭈그러드는 기분이 들었다. 왜 같은 상황에 이렇게 다른 마음이 드는 걸까?
고민이 깊었지만 길지는 않았다. 그 상황을 벗어나자, 마음 구석에 처박아두고 잊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 뒤,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응, 잘 지내지, 나 퇴사했어.”
‘거봐, 쉽잖아! 왜 말을 못 해? 내가 퇴사했다, 나 퇴사자다. 왜 말을 못 했냐고.’
친구에게 말하며, 구석에 던져둔 마음이 올라왔다.
“어쩐지 목소리 좋더라! 잘했어!! 너무 잘했어. 너 그럴 자격 있어. 좀 쉬자.”
친구의 따뜻한 위로에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렇지? 맞아, 나 자격 있어.”
친구의 한마디로, 그날 내가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찌그러진 캔처럼 주춤거렸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내가, 나의 결정이 이해받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보통 퇴사했다고 하면 돌아오는 질문은 “왜?”다. 힘들어서 그만뒀겠지. 아니면 회사가 몹쓸 짓을 했거나. 뻔한 이유가 왜 그리도 궁금한지 모르겠다. 그냥 “그랬구나, 고생했겠다.” 한마디면 되는데.
아니 사실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습관어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이해받겠다고 구구절절 치졸하다 싶을 만큼 사연을 말한다. 물론 이해받고 싶은 사람에게만.
그런데 이해받지 못하면 마음이 구석으로 도망쳐서, 삐진다. 그런데 그게 맞지 않을까? 그 사람이 내가 아닌데 어떻게 다 이해를 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우리는 가치관도 다른데.
내 퇴사가 나한테나 정당하지, 누군가에게는 복에 겨운 일일 수도 있다.
이 치졸해 보이는 과정과 설명을 가족에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 속 깊은 사연을 가족은 몰랐으면 했다. 마치 전장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사람으로 보일 가능성도 싫었다. 그래서 ‘침묵’을 선택했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것은 사회 통념상 ‘문제’로 여겨질 때가 있다.
‘왜 퇴사했지?’라는 의문을 남기며.
그 의문의 꼬리표가 부모님께 달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자랑스러운 ‘엄친아’까지는 아니 라도, 잘 큰 아이고 싶었다.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사는 사람으로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 못할까 봐 걱정한 것이다. 난 정말 ‘혼자’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뛰다가 넘어졌고, 흙먼지 털어내기 위해 벤치에 앉았을 뿐이다. 그리고 넘어진 김에 쉬어 가는 중이다.
그래서 퇴사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친구에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이해받자, 울컥한 것이다. 말이 필요 없는 관계의 편안함이, 마음을 위로했다.
그런데 친구는 어떻게 말하지 않아도 이해했을까?
그건 내가 지속적으로 알렸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지친다고, 고생하고 있다고. 그럼 가족에게는? 안 했다. 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괜히 힘든 내색 해서 뭐 하겠는가. 같이 힘들기만 하지. 그래서 침묵했다. 그러니 이 사태가 나오는 것이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말 안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그럴 리가 없는데. 입장을 반대로 해서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것도 모르고 희희낙락했다고 생각해 보면, 답이 보인다. 역지사지의 마음이 필요한 것이다.
내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바로 나의 어머니가 그러셨다. 쓰러지시는 그 순간까지 아프다는 말씀을 안 하셨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회사 다니는 딸 힘들다고 괜찮다고 하셨다. 병원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면, 매일 병원을 가면서도 어머니의 정확한 상태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이었고, 나의 한이 되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도 똑같이 반복한다. 소중한 사람들일수록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러다 보니, 정말 힘들어서 일어날 수 없는 순간에 이해를 못 받을까 봐 겁을 먹는 거다.
그냥 두 마디면 됐다. “힘들어서 그만뒀어요.”
그럼 돌아올 말은 “고생했다.”지, “그래도 참았어야지, 요즘 경기도 안 좋은데…”는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럴 수도 있지”가 이미 그 의미였기 때문이다. 그 말 앞에 붙은 … 에는 많은 말이 들어간다.
“괜찮아”이거나, “오죽하면”일 수도 있다. 뒤에 ‘만’이 붙어서 상처 줄 일은 없다.
“그럴 수도 있지만, 참아보지 그랬어”
적어도 나의 가족들이 할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겁쟁이는 주춤 뒷걸음질 치며 도망쳐버린 것이다. 죄송하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이해받길 바라고, 이해받지 못할까 봐 도망치고. 이러니 곤충 보고 뒤로 넘어지는 것이다. 겁쟁이처럼.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한 마디면 된다.
난 퇴사했다. 이유가 있었고, 퇴사한 것을 지금은 후회하지 않는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는 모르겠다. 가보지 않은 시간을 확신할 순 없으니까.
그러니 누가 물으면 말하면 된다.
“오늘 쉬는 날이에요?”
“네.”
다른 말이 필요할까? 말 뒤에 숨은 주어까지 찾아서 답해줄 필요는 없다. 그래도 필요하다면.
“네, 퇴사했어요.”라고 말하면 된다. 그 뒤에 발생되는 그들의 감정까지는 고민하지 말자.
설사 “왜요?”라고 물으면, 내키는 만큼 말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돌아오는 피드백은 그들의 감정이므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다만, 소중한 사람에게만은 솔직하게 말하면 된다. 너무 늦지 않도록. 정말 소중한 사람이라면 날 이해할 것이라 믿으며.
그런 의미에서 편편이랑 산책 가야겠다. 퇴사 후 가능해진 소중한 일상이다.
“편편아, 엄마 글 다 썼다. 날씨도 좋은데 산책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