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권리를 주세요.

춘향이와 변학도를 기억하세요?

by 달빛기차

숨 쉬다 화상 입을 듯 공기마저 뜨거운 올여름, 목뒤에 닿는 머리카락이 한증막을 만들었다. 그래서 고민하다 시원하게 목을 들어내기로 했다. 쇼-옷커트


결심은 거북이처럼 느리지만, 행동은 토끼같이 빠른 것이 단점인 나였다. 강아지와 산책길에 결심이 완료되자 앞뒤 안 보고 바로 미용실로 직진했다. 개 딸에게 양해는 당연히 구하지 않았다. 산책로는 내 권한이니까. 씩씩하게 미용실 문을 두드린 나는,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조신하게 양해를 구했다.


“안녕하세요. 저 커트-될까요?”

가끔 강아지랑 가던 곳이라 개딸에 대한 소개 “강아지랑 같이”는 생략됐다. 디자이너쌤은 위아래 좌우를 바라보시고는.
“그럼요. 앉으세요. 어느 정도로 자르시게요?”

역시 시원하신 답변에, 나의 갈등이 다시 시작된다. 숏커트 스타일은 여름철 감나무에 열린 열매보다 많다. 그중 내가 아는 것은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러니 선택의 폭이 넓지는 않았다. 다만, 하고 싶은 것과 해도 되는 것 사이에서, 사탕과 젤리를 두고 고민하는 아이처럼 갈팡질팡하는 거였다. 한 번 자르면 복구에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린다. 그러므로 토끼의 스피드로 사진을 찾아서 신중한 손길로 쌤한테 내밀었다.


“어울릴까요?”

나도 안다. 진상 손님의 출연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고 타인의 의견을 묻다니. “쯧-!“

더위보다 더 피곤한 손님이지만, 책임 전가는 하지 않으므로 양해해 주길 바란다. 그런 자신의 정체성은 잘 파악하고, 진지한 눈빛으로 전문가의 한마디만 기다린다.


‘예스 오알 노우~! 쌤의 선택은?’

사실 어떤 답을 주셔도 달라지는 것은 없지만, 기왕이면 yes를 듣고 커트를 진행하고 싶었다. 그래서 간절한 눈동자를 잠자리처럼 굴리며 대답을 기다렸다. 초 단위의 시간을 새며… 초조하게 기다리던 시간.

“귀를 파야겠네요. 남자들이 주로 하는 스타일인데… 괜찮을 것 같긴 해요.”
‘그 말 사이 침묵은 뭐죠? 정말 괜찮은 것이 맞겠죠? 쌤~’

샘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습관처럼 마음속으로 불안의 목소리를 낸다.

“그럼 이렇게 해주세요.”

불안과 다르게 입은 이미 “콜!”을 외치고 있었다. 카드게임은 이기기 힘들겠지만, 여기서는 이겨보리란 마음으로. 그러나 마음은… 가능하겠어?


“사각사각사각’

열기를 머금은 머리카락이 더위처럼 시원하게 잘려 나갔다.

‘하... 하하...’

거침없는 가위질에 사각이는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심장이 잘게 요동쳤다.

‘이미 시작됐어... 포기하자…’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거울 안에 낯선 이가 찾아왔다. 이대로는 안된다는 심정으로 사각이는 소리 너머로 들리는 소음에 귀를 기울였다.


“어머, 사람 많은 것 좀 보소…”

다른 손님들이 보고 있는 TV소리였다. 다행히 집중할 소리를 찾은 나는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웠다. TV를 보고 싶었지만, 커트를 할 때는 움직이면 사고 난다. 청력만 볼륨을 높였다.

“춘향이 아닌가?”

‘오-춘향이라… 오랜만이네. 아니다… 얼마 전에 다른 프로그램에서 봤나?’

아리까리한 기억에 고개를 갸웃거릴 뻔했다. 한 번의 고비를 잘 넘긴 나는 다시 ‘춘향이’를 떠올렸다. 문득 잊힌 기억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그리고 약 올리듯 머릿속을 과속하며 지나갔다. 내가 과속 딱지를 떼려고 할 때, 쌤이 다른 손님에게 말을 건넸다.


“춘향이요? 그 변학도가 좋다고 한 춘향이요?”

“네, 그 왜 변학도가 죽자 사자 쫓아다녔잖아요.”

분명 나와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옆에 손님과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동네 미용실은 다 알음알음 아는 사이라서 한 분이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모두가 참여한다. 여기선 빼는 거 없다. I도 E가 되는 마력의 공간이 된다. 물론, 타이밍을 보고 들어가야 하므로, 난 잠시 대기 중이었다.

“그랬나요?”

“그랬죠. 그래서 몽룡이가 고생했잖아요. 결국 변학도가 스토킹으로 잡혀갔죠.”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오래전 읽었던 기사의 사진 한 장이 떠올랐다. 그리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춘향이는 알까?’

자신의 아픈 시간이 어떻게 회자되는지 알고 있을까? 아마 알겠지. 대중 앞에 선다는 것은, 잔인한 시선까지 포함하고 있으니까. 한 번의 기사가 등에 붙은 낙서처럼, 떨어지지 않고 쫓아다닌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 안 된 ‘카더라’라도 말이다.


어느 연예인의 말처럼, 그들은 정치하는 공인보다 더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정치인의 비자금 수수는 쉽게 잊혀도, 연예인의 연애사는 쉽게 잊히지 않는 것처럼.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화를 하면 안 되니, 마음에 주의를 주고 계속 생각했다.

이 섬뜩한 느낌은 경고였다. 나도 낙서의 주인공이 되거나, 낙서를 달 수 있다는 것이다.


가뭄에 비오 듯, 아주 가끔 말에 생각을 담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어머, 춘향이 아니야? 왜 그 이몽룡하고 사귀면서 변학도랑 바람피웠던 여자. 몰라?”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내는 자유로운 입들이 있다. 그것도 그 사람 바로 옆에서. 그 능력으로 소설을 쓰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막장 장르로. 더욱이 그들은 앞담화를 뒷담화로 착각하고 한다.

지금 미용실에는 그런 분이 안 계셔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섬뜩함이 결국 범죄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명예훼손에, 묵시적 동조자로.


dreamina-2025-08-08-1439-독창적. 도심 한복판. 짧은 커트머리 여성이 길을 걷다가 고개만 뒤를 돌....jpeg

거울을 통해 춘향이의 얼굴을 살펴봤다. 좋아 보였다.

‘내가 만약 춘향이라면…?’

의미 없는 상상이지만, 손끝이 저려왔다. 그리고 심장이 잔인하게 두들기며 말했다.

‘넌 이미 춘향이야, 그리고 묵시적 동조자고’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지금 누가 누구를 걱정하는 것인가? 오지랖을 넘어 자만이었다.

대중만 잔인하고, 연예인만 주홍글씨가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나 또한 낙인의 피해자였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잔혹한, 비평가의 피해자.


그 피해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이 잘 못하거나 실수한 일의 대부분을 기억한다. 물론 자잘하게 동전 잃어버리고, 물을 쏟는 등의 일은 제외하고.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슬라이딩하거나, 회사 계단에서 구르고, 자전거 타다가 날아가길 세 번. 이런 부끄러운 일부터 죄의식으로 가슴을 짓눌리는 일까지 모두 생생히 기억한다. 그리고 소처럼 되새김질한다.

‘맞아… 그때 그랬지’

평소에는 가슴속이나 머릿속에 숨겨뒀다가, 트리거만 나타나면 바로 꺼내 보는 것이다. 어떨 때는 스스로 트리거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리고 말한다.

‘너도 그랬잖아. 부끄러운 줄 알고 조용히 있어.’

반성해도 소용없고, 반복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한 번 그랬으면 잊지 않고 말한다.

‘너 그랬잖아’


나는 왜 스스로에게 잊힐 권리를 주지 않는 것일까?

물론 모든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어떤 일은 분명 평생 기억하고, 반성하거나 주의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All’이 아니라, Sometimes라는 것이다.

아무튼 정말 필요한 기억만 장기 보관하고, 필요할 때 꺼내서 반성하거나 활용하면 된다.

문제는 이렇게 사용하기보다, 기억의 채찍을 휘두르는 것이다.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채찍을 휘두르며, 스스로에게 피 멍을 만든다.


기억의 용량은 한정되어 있다. 무한정 기억할 수 없어서, 가득차면 선택을 한다.

“행복한 기억을 남기겠습니까? 불행한 기억을 남기겠습니까?”

평범한 기억을 지우고도 용량이 부족하면, 나는 후자를 선택한다.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다 됐어요.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아…’

거울 속에 낯선 할머니가 한 분 앉아 계셨다. 염색을 하지 않아서 앞머리는 희끗희끗하고, 얼굴은 더위에 찌들어 있었다. 그리고 한 명 더 있었다.

‘맞다… 나 숏커트하면, 남자애 같은데.’

그 중요한 기억을 잊고 또 숏커트에 도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걸 지우면 안 된다. 쓸데없이 산책하다 넘어져서 창피했던 기억을 남길 것이 아니라.

“감사합니다. 하하하”

급하게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다시 손질을 해줬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20년 전 까까머리 중학생이 보인다. 이런….

괜찮다 3개월만 지나면 다시 머리카락은 자란다. 마음이 자라는 속도보다는 빠르니까.

그러니, 까까머리는 기억하고 내 인생의 변학도는 잊자.


오늘 잊힐 권리를 잘 이용하셨나요?

그럼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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