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가 걱정도 안 돼?

90년대 배꼽티를 입어보셨나요?

by 달빛기차

나는 2000년대를 살아온 딸이다.

클럽에서 인디밴드 음악을 듣고, 심야 영화를 즐기며 젊음을 누리던 자유분방한 딸. 그럼에도 통금도 없었고, 늦은 밤 단 한 번도 “딸, 어디야?”란 전화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럴 때 복에 겹다고 하겠지만 그게 못내 아쉬웠던 나는, “엄마, 엄마는 내가 걱정도 안 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때 들은 어머니의 말씀이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면서…


나는 조부모님 밑에서 컸다. 그래서 그런지 친구들이 고지식하다고 할 만큼, 스스로에게 고루한 편이다. 그런 나에 비해 어머니는 생각이 신식이셨다. 전쟁을 겪은 신 세대이면서도 말이다. 그 시절 사진만 봐도 나와는 참 다른 분이셨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일은, 초등학교 때였다.

평소 하얀 수선화같이 예쁜 미소를 잘 보여주지 않으시는 어머니는, 모처럼 상기된 표정으로 집에 돌아오셨다. 손에는 그날의 마음만큼 묵직한 쇼핑백을 들고.


“딸, 엄마가 옷 사 왔어.”

“옷? 내 거? 왜?”


당시의 나는 애교 많은 딸이었다. 내 인생에서 어머니 한정, 애교쟁이었다. 다만, 옷에 대한 욕구가 별로 없는 아이의 반응일 뿐이었다. 옷이란 추위 잘 막아주고, 낡고 헤지지만 않으면 된다는 주의였다. 그러니 옷을 새로 산다? 낭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도 내 옷을 사시면 항상 눈치를 보셨다. 까다로운 딸이 잔소리가 심하니까.

반면, 나는 어머니가 본인 옷을 사시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었다. 예쁜 구두, 예쁜 옷, 예쁜 화장, 모두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를 보는 것이 즐거웠으니까. 그건 물건 이상의 다른 가치를 가졌다.


그래서 그날도 어머니는 내게 80% 정도의 시선 회피 스킬을 쓰시며 옷을 하나하나 꺼내 놓으셨다. ‘아는 지인을 통해’ 싸게 샀다는 강조도 잊지 않으시며. 내 반응을 조심스럽게 살피셨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어머니가 내 눈치를 보게 했으니, 참 못된 딸이다. 어머니가 고생해서 버신 돈으로 딸에게 예쁜 옷 하나 사주고 싶은 마음을 왜 이해 못 했을까. 감사하다 하면 그 마음이 더 기쁘셨을 텐데. 못된 딸내미는 ‘왜?’라는 가자미눈을 하고 지켜보니, 눈치를 보시던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속상하셨을까.


그날도 그런 눈치를 보시며, 주섬주섬 꺼내 놓으신 옷은 모두 티셔츠였다.

노란색에 흰색 … 원색의 향연. 어머니 스타일이 반영된 모두 내 옷이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스스로 옷을 사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일 년에 한두 번? 그러니 내 옷은 모두 어머니 취향이셨다.

옷이란 선물 받았으면 입어봐야 하는 것이 인지상정. 어머니 앞에서 패션쇼를 시작했다.


첫 타자,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


두 번째 타자, 노란색 쫄쫄이 티셔츠…

“엄마 이거 너무 달라붙지 않아요? 거기다 이거 너무 파였잖아!”

“뭐가 파여. 예뻐, 다음 거 입어봐”

“아… 진짜….”

“빨리, 다음”


세 번째 타자, 이건 용납이 안되지.

“엄마! 배꼽티잖아!”

세상에 어느 어머니가, 초등학교 5학년 딸에게 배꼽티를 사 준단 말인가?

“유행이래!”

패션에 양보가 없는 신식 어머니셨다.

“아니 유행이라도!!”

“이때 아니면 언제 입어!”

“아 쫌!!”


투닥거리던 그날의 실랑이는 모두 내 서랍장에 들어가는 것으로 끝이 났다. 어차피 지인 통해서 싸게 샀다고 하셨으니, 반품은 어려웠고, 배꼽티는 그렇게 기억 속에 깊이 잠들었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까지는.


그다음 해 여름 방학은 조부모님 댁에서 신나게 보냈다. 산으로 들로 뛰어나며 매일 같이 빨래를 만들었고, 올라오던 날에는 가지고 간 옷을 모두 소비한 상태였다. 노는 일에만 정신을 쏟았던 나는, 올라오는 날 입을 옷을 남겨두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도 아찔했다.

그런데 가방 구석에 옷 하나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바로 흰색에 검은색 라인이 예쁘게 들어간 배꼽티였다. 잊힌 기억 속 그 아이, 내가 외면한 그 옷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나야 네가 싫어하는 배꼽티.

어머니의 치밀한 계획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당신의 선택은?

냄새 폴폴 풍기고 더러운 입던 옷을 다시 입는다 vs 터질 듯하게 달라붙는 배꼽티를 입느냐


도저히 냄새나는 옷을 입을 수는 없기에, 한숨 100번 쉬고 그 옷을 입었다. 그리고 사람 많은 기차를 타고 도착한 기차역.

“거봐 잘 어울리잖아.”

마중 나온 어머니가 얼마나 환하게 웃으시는지. 그럼 됐다.

그리고 그 옷은 다시 서랍 속에서 고이 잠들어 있다가 헌 옷 함으로 들어갔다. 내 인생 유일한 배꼽티와의 작별이었다.

어머니는 항상 옳았다. 그 뒤 배꼽티는 입고 싶어도 입을 수 없는 옷이 됐으니.


언제나 현명해 보이시는 나의 어머니께, 20대 딸내미는 어땠을까?

왜 자정이 다 되도록 “어디야?”란 전화 한 통을 안 하셨을까?

울분을 토하 듯 “엄마는 내가 걱정이 되지도 않아?”란 말에 어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네가 알아서 잘하잖아. 미리 다 말해주는데, 무슨 걱정을 해.”


당시 나는 어머니의 곰살맞은 딸이었다.

밖에 나갔다 오면 하루 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주알고주알, 어머니 옆에서 쫑알쫑알 이야기했다. 당연히 늦게 들어가는 날은 미리 말씀드리고, 약속된 시간보다 늦어지면 연락드렸다.

그래도, 그렇다 하더라도. 딸이, 20살 딸내미가 12시가 다 돼서 들어오고 심야영화를 본다는데 안 말린다니.

중학교 땐 도서실에 있다가 늦었을 땐 그렇게 혼내시더니, 어떻게 이렇게 변하셨는지.


“걱정도 안 돼?”

“무슨 걱정을 해. 네가 알아서 다 잘하는데.”


믿음이었다. 나에 대한 확실한 믿음.

그 믿음이 뭉클하면서도, 7%의 아쉬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친구들이 들으면 한 소리 하겠지만, 난 어머니의 간섭을 좀 받고 싶었다. 방목형 사랑이 고귀함을 모르는 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을 믿던 어머니의 방목형 사랑이 걱정이 되는 순간들 찾아왔다.


믿었던 딸내미가 카드 사고를 쳤다.

2000년대 신용카드가 막 세상을 휩쓸던 시기, 나에게도 신용카드 한 장이 생겼다. 직장도 다니지 않던 내게 쌓인 ‘신용’은 없었다. 은행은 잔고 실적으로 신용카드 개설을 권유했다. 무지했던 나는 별생각 없이 만들었고, 그 함정에 빠졌다.

세상에!


돈의 무서움도 모르던 ‘아이’에겐 ‘신용’의 세계는 신세계였다. 당시 나는 쓰고 갚는 다를 단순하게 생각했고, 생각 없이 ‘쓰다’에 빠져들었다. 평소 가지고 싶었던 디지털카메라를 먼저 질렀다.


“카메라 샀어?”
“어??? 아…응… 알바비로 샀어요.”

당당하지 못하게, 묻지도 않는 돈의 출처를 말하며 카메라를 숨겼다. 카메라를 살 때는 어머니와 사진을 찍겠다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아직도 내 서랍에서 잠들어 있는 카메라에는 100장도 안 되는 사진이 같이 잠들어 있다. 그 안에는 어머니의 사진은 없다.

그리고 ‘갚는다’가 곧이어 돌아왔다.


당연히 통장의 잔고를 초과해서 사용했고, 결제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손톱을 물어뜯으며, 어찌해야 할지 몰라 동동거렸다.


‘신용불량자 vs 어머니의 믿음에 대한 배신’

잘못을 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특히 딸내미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 고민은 크지 않았다. 솔직한 것이 답이었다.


“엄마… 저 사고 쳤어요.”

그날 어머니는, 내가 살면서 본 가장 무서운 표정이었다. 실망이라는 이름의 슬픈 표정. 어머니의 신뢰를 배신한 것이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 그 뒤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갚았지만, 그날의 어머니 표정은 잊히지 않았다.


난 그날의 사건으로 어머니의 신뢰를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어머니는 강하셨다. 한 번의 실수로 나를 판단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날의 일을 꺼내지 않으셨다.

실수로도 “너 그때”라든지, “잘 쓰고 있지?”라든지… 그 어떤 뉘앙스로도 말하지 않으셨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실수는 실수로 넘겨주셨다.


시간이 흘러, 세월의 무게가 어머니를 무너트리는 시간이 우리에게도 찾아왔다.

어머니의 암이 재발한 것이다. 대장을 꽉 막고 있는 암덩어리는 어머니의 시간을 좀먹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간은 병원 안에서 빠르게 흘러갔고, 우리의 관계도 달라졌다. 병원에 입원하신 어머니와 간병하는 딸로.


난 정 많고 듬직한 딸이었지만, 그보다 호랑이처럼 사나운 딸이었다. 우리는 매일 병원에서 싸웠다. 사소한 것도 있었고, 중대한 문제도 있었다. 모녀의 싸움은 주변사람들이 질릴 만큼 일상이 됐고, 언제나 간병 중인 내가 승리했다. 그때 어머니의 표정이 어떠셨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속상한 어머니가 하신 말씀은 가슴에 남았다.


“넌 정말, 입안의 혀처럼 굴다가도, 이럴 때는 정말 정 떨어져.”


우리는 어쩌면 어머니의 말씀처럼 서로에게 정을 떼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말씀 후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는 담당 의사의 권유로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셨다. 우리에겐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는 내 걱정을 내비치셨다.


“하나 더 낳을 걸.”

혼자 남겨질 내가 걱정인지 평생 안 하시던 후회를 하시며.

결국 방목형 사랑은 어머니가 계셨기에 가능했다. 믿음이란 울타리 안에 있었기에 완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남겨두고 가야 하는 어머니는, 더 이상 같이할 수 없기에 처음으로 딸을 걱정하는 말을 남기셨다.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지.


“딸, 10년만 엄마 대신 산다고 생각하고 살아.”

그렇게 10년을 살았다.

그렇게 살다 보니 내 어깨에 어머니의 무게가 내려앉았다.

방목형 믿음은 잊은 채, 신뢰란 이름이 아니라 ‘어머니의 성함’의 무게가.

그분이 바라신 것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나는 어머니가 주신 고귀한 마음은 잊고, 스스로를 타박하며 ‘더더더’에 빠졌다.

어머니의 성함에 먹칠하지 않는 사람이 돼야 한다며, 어머니도 안 하신 채찍질을 하고 산 것이다.

‘엄마 없어서 그래’란 의미 없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바보같이.


어머니도 엄마가 처음이듯, 나도 딸이 처음인데 왜 나면 모든 것이 서툴다고 느껴지는지. 지금 이 순간까지.

노란 수선화 같이 웃으며 이별한 나의 어머니,

“엄마, 딸이 처음이라 실수가 많아요. 그래도 마음은 아시죠?”


다들 처음인 인생을 잘 보내고 계시나요?

그럼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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