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살쟁이는 오늘도 아픕니다.
어깨와 무릎이 좋지 않아서 도수치료를 받고 있는데, 너무 아프다.
내 마음을 닮아 돌 같이 굳어버린 근육을 선생님이 풀어주실 때면, 나의 아집을 설득하듯 쉽지 않다.
작은 손길 한 번에 밀려오는 아픔은 수 십 개의 바늘이 꽂힌 지압 신발을 신고, 삶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 채 암벽등반하는 기분이다.
마음속으로 수십 번 “그만!”이라고 외치며 도망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습관처럼 숨만 참았다. 신음이라도 나올까, 더 큰 고통으로 상쇄하기 위해 입술이 파리해질 때까지 깨물었다.
왜 나는 고통을 더해가면서까지, 내면의 소리를 차단했을까.
아프다는 말이 부끄럽거나 해서는 안 되는 말도 아닌데, 왜 하지 못할까?
기억을 더듬어보면, 중학교 때 아파서 잠을 설치고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진료 후 핼쑥한 얼굴로 배를 부여잡고, 간호사 선생님과 이야기 중인 어머니를 기다렸다.
“아이가 엄살이 심하네요. 수납하시고 처방전 받으시면 돼요.”
“네, 감사합니다.”
‘아... 나 엄살이었구나.’
어젯밤부터 나를 괴롭히던 위통 보다, 사랑니를 빼고 난 뒤 욱신거리던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리며 열기에 아려 왔다. 간호사 선생님의 말 끝에 묻어나는 웃음이, 속상한 마음을 밀어내고 수치심을 끌어올렸다. 그 자리가 부끄러워서 도둑고양이처럼 인사하고 병원을 나섰다.
돌아서는 길에 어머니를 흘끔 쳐다보았다. 아무런 변호도 해주지 않던 어머니가 야속했다.
‘엄마, 나 정말 엄살이야?’
아니라는 확인을 받고 싶었지만, 나를 간호하느라 밤을 새신 어머니는 피곤에 절여진 오이처럼 간신히 걷고 계셨다. 여물지 못한 어린 마음은 야속함을 놓아주지 못하고, 하지 못한 말만 곱게 접어 마음 한편에 꽂아두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아플 때면 마음속에서 집착적으로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나 또 엄살 아니야?’
그리고 식은땀이 나는지 열은 없는지, 아프지 않은 근거들을 수집했다. 체온계는 38.7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봐, 별거 아니잖아. 열이 40도는 돼야지.’
아프지는 않지만, 회사원에게는 건강도 자기 관리 능력의 평가 항목이기 때문에 업무에 영향이 있을 것 같으면 미리 병원에 갔다.
“별로 아픈 건 아닌데… 조금 불편해서 왔어요.”
하지만 힘들어서 찾아간 병원에서는 배우가 정해진 대본을 읽듯, 항상 같은 말만 반복했다. 다른 말은 용납되지 않았다.
그렇게 아이는 ‘아픔’을 ‘불편’으로 둔갑하여, 내게 새겨진 ‘엄살쟁이’ 낙인을 지우려 노력했다.
강아지에 물리는 일만 없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평소에는 순하다 가도 눈이 돌면 앞뒤 분간을 못하는 것이, 딱 자기 보호자를 닮은 강아지에게 손목을 물린 적이 있었다. 하필 혈관 부근이라, 순식간에 붉은 피가 여름철 시원하게 흐르는 계곡물처럼 쏟아져 바닥을 적셨다.
“동맥은 안 다친 것 같은데? 괜찮지?”
확신의 고개를 끄덕이며.
“운이 좋았어! 아, 근데 응급실 가야 하나?”
주말 밤이라 병원은 문을 열지 않았고, 지혈이 잘되지 않는 손목을 살피며 혼잣말만 계속했다.
“에이, 아프지도 않은데 뭐. 내일 봐서 못 움직이면 가지 뭐.”
손은 이미 퉁퉁 부어가고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피식 웃고는 바닥 청소를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내 안에서 뜨겁게 삶을 함께했던 붉은 피가, 생을 다하여 비릿함을 풍기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때 문득 내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그런데… 운이 좋은 것이 맞나? 아니… 안 아픈 게 맞아?’
안 아플 수 없을 상처를 보고, 아프지 않다고 말하는 나. 그것이 진심일까? 그렇다면 난 통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손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나 여기 있어’라고 혈관들이 비명이라도 지르듯 통증이 뜨겁게 요동치며 찾아왔다.
“윽-“
물리던 순간을 제외하고는 처음으로 신음 소리가 새어나 왔다. 당황하며 손목을 바라보니 하얗던 붕대는 어느새 붉게 물들어, 마치 ‘레드카드’처럼 보였다. 바닥을 딱 던 휴지 위로 붕대를 벗어난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고, 눈앞이 핑 돌았다.
‘아… 나 빈혈인데.’
스스로의 암시에 걸려 통증에 무감해진 내가 나를 돌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죽음의 문턱에서도 ‘피식’ 웃어버리고 손 내밀까 봐, 발가락 끝에서부터 송충이가 기어올라 오듯 섬뜩한 소름이 돋았다.
그날 느낀 섬뜩함은, 아픔을 두려워하는 내 마음과 맞닿아 있는 것도 같다.
난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그중 두통은 내 삶의 기생충이다. 7살 때 처음 나타난 녀석은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힌다. 처음 두통이 시작됐을 때 먹기 시작한 약은, 반 알로 시작해서 2~3개월 만에 두 알을 먹어도 듣지 않았다. 더 이상 약은 늘릴 수 없었기에, 두통이 오면 누워만 있었다.
친구들과 매일 뛰어놀던 일상은 뜸해지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아이의 설렘은 슬픔으로 점철되었다. 약을 먹으면 늘 잠이 들었고, 그런 아이를 보여줄 수 없던 할머니는 어머니의 방문을 거절하셨다. 그렇게 두통은 내게서 소중한 자유를 빼앗고, 해맑음을 파괴해 갔다.
그래서 난 아픈 것이 끔찍하게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 어린 시절이 나를 ‘엄살쟁이’로 보이게 했던 건 아닐까?
그렇다 하더라도 엄살쟁이라고 불리기는 싫어서, 늘 남들과 내 아픔을 비교하며 평가했다.
감기에 걸리면 독감으로 독감에 걸리면 폐렴을 천칭에 놓고, 정의의 여신 디케라도 된 듯 저울질했다. 마음으로부터 중립이 사라진 저울은 항상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결과는 충실히 받아들였다.
‘그래, 그 정도는 돼야 아픈 거지. 이건 아픈 것이 아니야.’
내 고통은 아픔으로 아픔은 불편으로 격하시키며, 응석쟁이를 달래 듯 내 안의 나를 괜찮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아픔’이란 것이 우위가 있는 것일까?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