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별거 아니라 말하는 나에게
그런데, ‘아픔’이란 것이 우위가 있는 것일까?
종이에 베이면 칼에 베인 것보다 더 아프다.
나는 ‘쓰-윽’ 베인 손가락을 입으로 달래지만, 애들은 손가락을 들고 큰일이 난 것처럼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트린다. 아이들 기준에서 세상이 무너진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닭똥 같은 눈물로 볼을 적시며 서럽게 우는 아이의 눈물을 닦아준다.
“우리 얘기 많이 아프겠네. 아픈 거 날아가라~! 호-오-” 라고 말하고 따뜻이 품어준다.
내 손가락의 아픔은 잊힌지 오래지만, 아이를 엄살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이와 내 아픔은 다를까? 아니면 같을까?
어릴 때, 뜨거운 열기가 남은 냄비를, 맨손으로 드시는 어머니를 보고 식겁한 일이 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엄마!”라고 급하게 소리치며, 다급하게 손을 낚아채서 살폈다.
어머니의 손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삶의 무게만큼 딱딱하게 내려앉은 굳은살의 존재는 낯설었다. 작은 언덕처럼 우둘투둘 솟아 있는 굳은살은, 솜털 보다 보드랍던 내 손엔 마냥 거칠고 아프기만 했다.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내 아픔보다, 더 아픈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엄마! 괜찮아?? 안 뜨거워??”
“괜찮아. 어여 앉아.”
0.1초의 고민도 없는 무심한 답변에 신뢰가 가지 않았지만, 반박할 말이 없어 한참을 어머니 손만 바라봤다. ‘아플 것 같은데…’라고, 냄비가 아니더라도.
그때 나는, 어머니가 나 때문에 아픔을 참는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몇 십년이 흘러 지금, 나도 똑 같은 소리를 듣는다.
“안 뜨거워요? 손 괜찮으세요?”
나도 이제 세월의 무게만큼 쌓인 굳은살이 삶의 열기를 막아줘서, 아프지 않다.
세월의 무게에 한 겹 두 겹, 굳은살이 되어가는 시간은, 삶의 서커스를 준비하 듯 나를 단련시켰다. 그 과정이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지나고 나니 기분 좋은 온도만 남았다. 어머니도 나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아닐 수도 있고.
이제는 안다. 나는 타인이 될 수 없기에, 공감을 할 순 있어도 비교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픔은 상대적이기에 우위도 정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일이다.
몇 달 전, 힘들어서 병원을 갔을 때, 독감 진단을 받았다.
‘헉, 나한테 독감 옮은 사람 있으면 어떡해?’
“이 정도면 지금 너무 힘들 텐데, 괜찮으세요?”
“네? 아픈 거 이제는 다 나았는데요?”
그때 몇 칠을 앓고 있었지만, 출근도 못하는 독감 환자들보다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일을 했다. 동료는 집에 가라고 했지만, 일이 밀리기도 했고 평소보다 조금 더 불편한 정도라고 생각했다. 정말 그날은 전날보다 괜찮다고 느꼈다.
선생님 말씀에 가슴속 낙인이 흐릿해지는 느낌이 들면서도, 머리가 띵하게 울렸다. 다시 생각하니 난 전혀 괜찮지 않았고, 지독히 힘든 시간을 버텨냈었다. 그러다 시간의 여유가 생겨서 병원에 간 것이다.
만약 지금처럼 산다면, 난 정말 죽음 앞에 선 통증 앞에서도 괜찮다고 말할 것이다. 췌장염으로 쓰러질때까지 통증을 참아내신 어머니처럼. 그럴 바에야 엄살쟁이가 되는 것이 옳은 선택 같다.
그런데, 엄살쟁이가, ‘엄살’이 나쁜 것이 맞을까? 간호사 선생님의 웃음의 의미가 비난이었을까?
아이 때는 멀리 사시는 어머니가 그립고 보고 싶어서, 관심이 고파서 아팠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그 따스한 시선이 떨어질라 치면 아기처럼 칭얼댔다.
어른이 되어 서는 회사란 정글집에서 불어오는 계절풍에, 멘탈이 추풍낙엽인 듯 자리 잡지 못하고 떠다녔다. 그러다 회사가 낙뢰를 동반한 비라도 내리면, 흔들리던 정신이 빗물에 녹아 흔적 없이 사라졌다. 정신없이는 일을 할 수 없기에, 비상으로 정신력을 수급한다. 그리고 급한 것들만 완벽하게 마무리하고 없는 병이나 일을 만들어 연차를 썼다.
세상에 정당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내 인생에 정당했고 타인에게 주는 피해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의 상사는 ‘공백’ 자체가 문제고 회사의 피해라고 말했다.
말 뜻은 알겠기에 멋쩍게 웃으며 “네, 관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돌아섰지만, 입안이 씁쓸하고 회의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픈 건 죄가 아니지만, 사회는 아니 정확히는 이익집단인 회사는 그렇지 않았다.
운동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휴식이 필요하 듯, 회사원도 그렇지 않을까? 회사원도 최전선에서 회사를 지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니까. 마라톤 선수는 페이스 조절이 필수고, 과도한 업무량에 지친 나는 휴식이 필요했으니까. 회사의 관점에 중심을 둔 상사의 말은 마음에 담지 않기로 했다.
어떻게 회사에서는 엄살쟁이란 낙인이 두렵지 않았을까?
돌이켜보면 자기 확신이 있었다. ‘엄살’이란 말이 치고 들어올 수 없을 만큼 치열하게 일했고, 그건 모두가 인정할 것이라고 스스로 믿었다. 그래서 상사의 말을 어이없게 웃으며 쳐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과로’로 아픈 것이 맞다고,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역시 내 아픔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맞다. 타인의 시선에 흔들릴 필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조금 알겠다. 엄살이라는 타인의 시선에 얽매일 필요 없이, 아프면 그냥 아픈 것이다.
재고 따지고 확신을 찾을 필요가 있을까? 아픈데.
이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어머니께서 ‘엄살’이란 말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은 건 대답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 같다. 아니까,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어머니는 아시니까. 그리고 그분이 비난하거나 무시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란 것도 아셨던 것 같다.
그러니 설사 엄살이어도 괜찮다. 분명 필요한 엄살일 테니까. 그래도 나의 인생이, 내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만리장성처럼 더 내 인생을 견고하게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환자분! 숨 참으시면 안 돼요, 숨 쉬세요.”
“아! 제가 또 숨 참았네요. 죄송해요. 휴-우-, 휴-우-“
도수치료 선생님의 말씀에, 다급하게 윗니에 눌려 있던 입술에 자유를 주었다. 그러자 입안에 억압돼있던 매몰찬 숨들이 다급히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하하하, 참으시면 효과가 없어요. 차라리 소리를 지르시는 게 좋아요.”
“그래요? 다들 이렇게 아파하나요?? 제가 좀 유별나죠?”
역시 오랜 세월 몸에 밴 습관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또다시 나는 타인과 비교하며 엄살쟁이가 되길 본능처럼 거부한다. 그래도 이제는 숨 쉬는 법을, 아프다고 말하는 법을 배웠다. 습관이 쌓인 시간만큼 시간이 흐른 후에는 괜찮아질 것이다.
“아니에요, 원래 이 부위가 많이 아파요. 오히려 잘 참고 계신데요. 그래도 참지 말고 꼭 숨 쉬는 거 잊지 마세요.”
“하하하, 네. 감사합니다.’
언젠가 다시 “엄살이 심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게 되는 날이 올지라도, 웃으며 응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엄살이 좋지 않은가? 진짜 아픈 것보다야.
혹시 숨을 참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숨 쉬세요! 휴-우-.
그럼 됐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