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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이 명품? 내가 명품!

나를 채우는 99%와 1%의 어떤 것, 명품가방 좋아하세요?

by 달빛기차

부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다.

명품가방을 든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는 미운 오리 새끼처럼 홀로 평범한 가방 들고 있었다. 참석한 부부들은 사람 좋은 미소와 달리, 냉정한 시선으로 동류인지 확인하듯 훑어보았다.

그들의 시선에 그녀의 검은색 핸드백이 포착되었다.

‘명품이 아니군’

용기 있는 한 남자가 그녀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선심이라도 쓰듯 으스대며 말했다.

“야, 제수씨 가방 좀 사드려. 요즘은 가격도 안 비싸.”

남자는 용기라 생각했지만, 사실은 오만이었다. 무뢰한이 포문을 열자, 군중은 이때다 싶어 포식자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기회를 탐했다. 한 마디라도 거들려는 듯 입술을 들썩거릴 때, 시선의 중심에 선 그녀는 화사하게 웃으며 군중을 바라봤다. 그리고 차분하면서도 여유 있는 모습으로 모두에게 미소로 말했다.

“제가 명품이잖아요.”

소신을 담은 재치 있는 한마디로 그녀는, 우물 안 백조가 모인 부부들 모임에서 고결한 주인공이 되었다.


자신의 가치를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고,

그녀의 말에 감명받은 나는 한동안 에코백을 고집한 적이 있었다.


에코백을 추앙하던 나는, 연애도 에코백 같았다.

편안하고 재사용이 가능하면 충분했고, 젊기에 빈약한 주머니 대신 풍족한 마음으로 아낌없이 그 순간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 시절 소박한 우리의 데이트는 언제나 지하철에서 시작되었다. 함께 지하철을 타고 도시를 누비다, 밤이 되면 집 앞에서 애절한 이별 영화를 찍었다. 지하철 데이트는 가끔 운 좋게 함께 앉을자리를 내어주었다. 녀석은 차가운 손을 핑계 삼아, 에코백 위에서 내 손을 조몰락거렸다. 손이 저려 올 즈음, 녀석은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손 주변을 유심히 바라봤다.


“자기야, 내가 가방 사줄게.”
“갑자기?”
“… 그냥. 여자들 가방 좋아하잖아.”
‘딱히?’


싸움이 될까 봐, 녀석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애써 모른척했다. 하지만 내 속이 우리가 잡고 있는 손가락처럼 꼬인 건지 녀석의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달콤한 시절의 애정공세라고 하기에는, 녀석의 손에서 냉기를 잃어버린 생수병처럼 속이 훤히 보였다.


당시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예쁜 디자인도 구하기 힘들었다. 녀석이 보았을 땐 후줄근해 보였을 수도 있다. 녀석의 열기로 뜨거워진 손을 놓고, 무릎 위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가방을 고쳐 들었다. 후줄근한 마음이 되지 않도록 자유로워진 손으로 가방을 다독이고, 녀석을 바라보며 "그래, 기대할게"라고 말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녀석이 말한 선물을 받지 못하고 헤어졌다. 우리는 보통의 연인들처럼 다름을 인정하기 어려웠고, 사소하지 않은 다툼에 지쳐갔다. 아름다운 이별은 없지만, 서로를 위한 이별이었다.

지금도 지하철 타는 날이면 문득 그 녀석이 생각날 때가 있다.
‘진짜 가방을 사줬을까?’ 하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이 수런거려서 내 손에 들린 가방과 타인의 가방을 본다.

헤어진 후에도 그때 그 말이 자존심에 각인처럼 남아, 설익은 자존감을 좀 먹는 것 같았다.

@CapCut생성


언제부터였을까, 고개만 돌리면 명품가방 하나쯤은 찾을 수 있다.

C넬, G찌, L통, P가모…

내 눈에는 다 비슷한 가방처럼 보였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행복한 사연들이 가득해 보였다.

딸아이가 첫 월급으로 선물해 준 숄더백.

남편의 비자금으로 선물 받은 클러치 백.

고달픈 회사 생활에 강제로 만든 활력소, 할부 중인 토트백.

다들 하나씩 들고 다니는 행복이, 나만 없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살까?’란 고민을 했다.


하지만 매번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이 떠올랐다.

기능을 다 활용 못하지만, 새로운 기능에 매료되는 최신형 핸드폰

읽지 않은 책들이 쌓여 있지만, 읽고 싶은 책들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

빠른 손의 셰프가 만든 회전초밥집 단골이지만, 신의 손을 가진 셰프의 오마카세.

군침 도는 목록들이 떠오를 때마다 카드를 슬쩍 다시 지갑에 넣었다.


나의 변덕은 몇 년간 시시때때로 계속됐다.

친한 친구가 새로 산 핸드백을 애지중지할 때,

직장 동료가 새로 산 백팩의 디자인보다 로고가 먼저 시선에 들어올 때,

누군가의 명품가방 속 사연이 내 가슴을 흔들 때마다 주책없이 지갑이 들썩였다.

속절없이 수런거리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할 때, 지인으로부터 명품가방을 하나 받았다.

멋쩍은 표정으로, 바닥이 살짝 찢어져서 수선해서 써야 한다는 말과 함께.


뜯어진 것이 무슨 문제란 말인가. 들뜬 표정으로 가방을 품에 안고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장마철 여름 날씨처럼 변덕스럽던 마음과 다르게 속내는 한겨울 내리는 비처럼 차가웠다. 새것이 아니라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동안 신기하리 만치 눈에 잔상처럼 남았던, 명품 로고가 보이지 않아서였다.

내 소유가 되는 순간, ‘명품’은 사라지고 ‘가방’만 남았다. 그동안 바라던 ‘명품’ 이상의 가치가 생기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수리비로 몇 십만 원을 써야 하는 그것은 계륵 같았다. 버릴 수도, 고칠 수도 없는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고민은 했지만, 결국 수선 없이 망가질 때까지 들고 다녔다.


이제는 너무 낡았지만 버리지 못하는 가방

그러다 내 소유인 명품가방의 바닥이 ‘우두둑’ 소리를 내며 완전히 떨어지던 순간, 피식하고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가방 안의 물건이 바닥으로 떨어지듯,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와르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아, 난 정말 가방에 별 관심이 없구나.’

가방 바닥의 마지막 한 가닥 바느질이 뜯어질 때까지 관심이 없었던 나를 알아차린 것이다.

정말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세상과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다.

그것을 알게 된 후, 나만의 진정한 가치를 찾게 됐다.


남들이 어이없이 웃으며 한마디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 가치가 상실되어 고물상에 팔려갈지라도,

내게 추억이 되고 웃음이 된다면, 그래서 가슴의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는다면.

그것이 내 시간을 먹고 추억에 물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소중한 나만의 가치인 것이다.


누군가는 주인의 무심함으로 무너져가는 가방을 보며, 안타까워할 수 있다.
수선해서 아주 오래 잘 쓴다면, 시간의 무게를 더해 그 이상의 가치가 생길 수도 있다고 말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가치 기준과 취향이 다르다.

나는 얼리어답터이고, 개인 서고의 맥시멀리스트이다.

다 읽지도 못한 책을 놓아두고, 좀 먹힌 자존감만큼 계속 책을 수집한다.

자존감에 숭숭 뚫어버린 바람구멍을 한 페이지 책장들로 메꿔가며, 언젠가 현명해질 나를 꿈꾼다.


그 꿈은 나를 K서점 최고 회원으로 만든 적이 있다. 서점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책의 향기를 두른 향수와 책 한 권, 그리고 묵직한 골드 문진’을 선물했다. 명품 클러치백 하나를 살 수 있는 금액을 사용하고 돌려받은 혜택은, 봄날의 추억처럼 따스하게 남았다.

누군가 보면 미친 짓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실 나도 등급 알림을 처음 받았을 때는, 소심한 심장이 새가슴처럼 펄럭거렸다.

‘허-어… 내가 그렇게 많이 샀어?’


명품 가방은 되팔기라도 하지. 수백만 원 주고 구입한 책은 되팔아 봐야 몇만 원이 안 된다.

특히 모두에게 사랑받았던 책은, X라딘도 안 받아준다.

책을 사유하고 내 안에 새긴다면 나는 오롯해지겠지만, 다 읽지 않은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책은 나에게 가장 가치 있고, 가슴 뛰는 소비 항목이다.

이 고백을 하기까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갈등하던 시간을 지나오니 이제는 알겠다.
그 시간이 자기 확신을 키우기 위한 성장통이었다는 것을.


오랜 시간 품어온 명품 가방을 향한 미적지근한 열망은, 자기 확신이 부족한 사람이 도심에서 만난 신기루였다.


타인과 같은 가치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그들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세상이 말하는 가치가 진짜 가치가 아닐까? 그래야 세상이 내게 행복을 선물하지 않을까.

나만의 가치를 찾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에 이끌려가던 시절이었다.



@CapCut생성

물론 아직도 휘청댈 때가 있다.

타인의 멋짐이 내게 와 나의 멋짐이 될 수 있을 것처럼,

타인의 소망이 나의 소망인 것처럼.

하지만 이제는 나의 가치를 알기에,

“오~ 멋진데. 잘 샀네.”

타인의 가치를 인정하고, 내 가치를 받아들이는.
“내가 명품이잖아.”


가슴 설레는 일이 있으신가요?

그럼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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