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 까미노길 액땜

말레이시아–싱가포르–프랑스 파리–생장

by Sal

두 달 가까이 집을 비워 두려니 이런저런 집정리에 시간이 많이 걸린다. 자동차도 배터리 나가지 말라고 너튜브에서 시키는 대로 이런저런 조치를 하고, 인터넷은 잠시 정지시키려다 그냥 끊어버리고, 집구석구석에 제발 please… 벌레 들어오지 말라고 나프탈렌도 던져 놓고, 출발 당일에는 (나 혼자 다 하는 건 아니지만)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세탁기 돌리고, 냉장고의 마지막 남은 음식은 아침으로 먹고, 마지막 청소하고, 마지막 빨래까지 널어놓고... 7시 40분이 되어서야 집에서 나왔다.



하나. 집을 나서자마자 부슬부슬 비가 온다. 배낭도 메고 공항까지 버스 타고 가야 하는데…. 쩝.


먼저 글의 초입이니, 오늘과 내일에 걸친 긴 여정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오늘 나는 내가 지금 사는 곳인 말레이시아에서 버스를 타고 싱가포르 창이공항까지 이동하고, 창이공항에서 오후 1시 50분 비행기로 프랑스 파리까지 간다. 새벽에 파리공항에 도착하니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노숙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기차와 버스를 섞어 타면서 까미노길의 시작도시인 생장(Saint-Jean-Pied-de-Port)까지 갈 계획이다. 요약하자면, 말레이시아–싱가포르–프랑스 파리–생장.


다시 말레이시아의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서, 비가 와서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는다. 1시간을 넘게 기다리다가 주변의 가게를 찾아가 물어보니 버스 정류장이 바뀌었다고 한다. 허걱! 버스 정류장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Close’ 표시도 없고 그냥 보통 평범한 멀쩡한 정류장인데, 나처럼 어쩌다 이 버스를 타는 사람이 골탕 먹기 딱 좋은 정류장이다.


다행히 우리처럼 속아 이 정류장으로 들어오는 현지인에게 사정해서 그의 차를 뻔뻔하게 아니 용감하게 얻어 타고 근처 정류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집 나온 지 두 시간 만에 싱가포르로 가는 CW버스를 탄다. 이제 안도의 한숨과 함께 빨리 공항에 가서 라운지로 가야지…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갑자기 버스가 스톱! 이건 또 뭔 일?


둘.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로 넘어가는 다리의 초입부터 차량이 꽉 막혀 있다. 여기는 다리 위라서 싱가포르 입국장까지 가기 전에는 임전무퇴, 진퇴양난, 돌아갈 수도 없는데…. 그 다리 위에서 우리는 바다와 우리 버스 앞에 멈춰 있는 트럭의 뒷모습과 버스 안에 시계만 마냥 쳐다보면서 또 50분 정도를 보낸다. 싱가포르 입국장에서 공항까지도 택시로 1시간 정도 걸리는데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멍해지면서 불길한 기운이 점점 강하게 느껴진다. 싱가포르 입국장에 도착하자마자 10kg 배낭을 멘 채로 전력질주!!! 우리 바로 앞에 내린 관광버스 승객들을 모두 제치고 싱가포르 입국 수속장으로 뛰어들었다.


셋. 옴마야!!! 입국수속 카운터에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놀이공원의 대기줄처럼 꼬불꼬불 시끌시끌 서있다. 이제는 서서히 불안과 초조가 나란히 손을 잡고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짜증 나는 내 머릿속은 혹시 이러다가 정말 비행기를 놓치면 항공요금 환불은 어떻게 되고, 예약해 놓은 숙소는, 그냥 돌아가면 주변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얘기할지 등의 최악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도 돌아간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내국인 창구는 텅 비었는데, 이렇게 긴 줄의 외국인 창구 꼴랑 두 개만 열어놓았다. 이런 XXX 시추에이션이 있나? 11시가 넘자 당초에 계획했던 비용 절감을 위해 지하철을 타고 공항까지 가는 계획은 포기한다. 그러면 택시를 타야 하는데, 택시비는 얼마지? 우리 싱가포르 현금은 있나? 매의 눈으로 창구 주변을 스캔하다가 경찰복 비슷한 복장의 근무자 한 명을 발견하고 접근한다. 최대한 불쌍, 처량, 억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우리의 절박한 시추에이션을 얘기하고 좀 빨리 처리해 줄 수 없는지 사정을 해본다.


“비행기표 보여주라.” “아이고! 요기요…”

“좀 빨리 나와야지!” “아침 7시 40분에 나왔는데, 막혀서….”


그 고마우신 직원을 따라서 태어나서 한 번도 넘어보지 못했던 ‘직원 외 출입금지’ 안내판이 붙어있을 법한 곳으로 가서 따로 수속을 한다. 아싸 살았다!


넷. 그런데 컴퓨터가 내 얼굴스캔을 하는데 내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고 앞으로 와라, 뒤로 물러라 명령만 계속 반복한다. 이것은 또 무슨 시추에이션이지? 컴퓨터를 껐다 켜기도 하고, 간절히 빌어보기도 하지만 역시 다시 한발 물러라, 앞으로 와라. 특별히 우리만 따로 빼서 입국 수속을 해주고 있는데 이 직원에게 뭐라고 불평을 할 수도 없고 꾹 참을 수밖에 없다. 결국 우리를 붐비지 않는 내국인 입국수속 창구로 데려가서 처리해 준다. 마음속으로 ‘야 >< 선생님!!! 처음부터 바로 이리 데려왔으면 너도 편하고 우리도 좋았잖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감사 인사를 꾸벅하고 나오자마자 버스 정류장으로 냅다 뛰어간다.


입국장 근처에는 택시가 없다고 한다. 결국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가 시내 근처까지 나가서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한다. 택시 뒷자리에서 배낭커버를 씌우고 테이핑을 하는 등등 배낭을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1시가 되고 드디어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 라운지는 이미 아주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 버렸고 우리는 탑승 게이트로 직행했다.


이상으로 승용차로 가면 1시간 거리를 5시간 넘게 걸려서 간 ‘가깝고도 먼 나라의 공항 가기’를 마친다. 이 정도면 까미노길 액땜은 확실히 충분히 넉넉하게 한 것 같다. 이제부터는 꽃길만 가자! 지금은 기내에서 포테토칩에 비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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