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cebadon에서 Ponferrada까지
평상시에는 7시 전후에 까미노길을 출발하지만, 오늘은 철의 십자가, Cruz de Ferro를 보러 가기 위해 일부러 느지막이 8시에 출발했다. 호스피탈레로가 너무 일찍 출발하면 해가 뜨지 않아서 철의 십자가를 볼 수 없다고 친절하게도 알려주신다. 덕분에 여유 있게 출발해서 오늘의 미션을 무사히 달성하고 내리막길을 내려가기 시작할 즈음부터 서서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후로는 능선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는 내내 TV 뉴스의 기상캐스터가 태풍이 올 때마다 하는 그 “돌풍을 동반한 비바람”을 직접 체험해 볼 수가 있었다. 비는 오고 바람도 불고 길은 험해지고….
오늘은 ‘Lluvia + Viento + Montana(비+바람+산)’의 3종 세트가 순례자를 괴롭히는 날이다. 평상시 같으면 빠르면 12시에 늦어도 2시 정도에는 도착하는 알베르게를 오늘은 오후 4시가 되어서 도착했다. 신발도 속까지 축축 젖고 몸도 마음도 축축 처져 있다. 체크인을 하는데 프로미스타에서 살사댄스를 가르쳐 주었던 마리가 나타나더니 폰페라다(Ponferrada)에서는 꼭 가봐야 할 곳을 강추해 준다. 그래서 몸도 마음도 전혀 동의를 하지 않지만 근처의 ‘기사단의 성(Castillo de Templario)’이라는 곳까지 구경했다. 왜? 오늘만 공짜라서.
그동안 내가 직접 만난 사람들에게 들은 까미노길을 걷는 이유를 몇 가지 적어본다. 정리하고 뭔가 일관성을 찾아서 결론을 도출하려는 그런 나쁜 병이 재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이런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이 길 위에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기억하려고 적어본다.
우선 30대 초반의 S언니는 직장생활에서 번아웃을 느끼고 휴식 또는 탈출을 위해서 걷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주 천천히 걷는다. 몸이 좀 아프면 한 곳에서 며칠씩 쉬기도 하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알베르게에서 하루 더 묵는 바람에 우리와 아주 작은 알베르게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동안 우리와 걷는 속도가 비슷해서 계속 같은 마을에 묵었는데, 며칠 비슷한 속도로 걷다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아마도 또 쉬나 보다. 많이 피곤한가 보다.
두 번째 50대 후반의 K아저씨는 조기퇴직 후 여러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다고 한다. 100년 넘게 살 확률이 매우 높은 현재의 상황에서, 본인의 후반기 삶에 대한 운영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 왔다고 한다. ‘후반기 인생계획 수립을 위한 워크숍’을 까미노길로 온 것 같다. 알베르게에서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에 맥주 한잔 권유를 해서 잠깐 자리를 같이 했는데, 말하는 어투나 술을 마시는 행동, 웃는 모습 등에서 아직 회사원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누가 보아도 퇴직한 지 얼마 안 된 분 같다. ㅎ 나도 예전 생각에 소름이 좌악 올라온다. 오 노!
세 번째로 대만에서 온 마이크는 60세인데 한참 전부터 본인이 세상을 보고 느끼는 폭이 점점 좁아지고 자꾸만 작아지는 본인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세상에 대해 변화를 주려고 고민하는 와중에, 얼마 전 건축가인 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바로 도전을 감행했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 먹을 것을 준비하고, 정리하고, 배낭을 꾸리고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는 폼이 그다지 이런 류의 여행경험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 가는 곳마다 열심히 사진을 찍어서 페이스북에 매일 올린다. 매번 만날 때마다 점점 여유로워지고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 최종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세상이 많이 넓어질 것 같다.
네 번째 코스타리카에서 온 다부진 체구의 안드레스는 아마존에서 4년간 일한 후에 좀 쉬고 싶어서 장기 휴가를 낼까 하다가, 아예 퇴사를 하고 까미노길을 이렇게 걷고 있다고 한다. 아무 때에나 다시 돌아가도 충분히 직장을 구할 자신이 있어서 그냥 그만두고 왔다고 한다. 젊어서인지 자신감이 넘쳐 보인다. 어떤 사람은 번아웃이 되어 쉬러 오고, 어떤 사람은 옆 마을 구경 가는 마음으로 오기도 하는 곳이 이곳인가 보다.
다섯 번째 브라질에서 온 이민전문 변호사 우고는 가톨릭 신자라서 종교적인 이유도 있지만 본인에 대한 도전의 의미가 더 크다고 말한다. 브라질의 대도시에서 와서인지, 여기에서는 길을 걷다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서로 ‘부엔 까미노’를 외치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걱정하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 마음속은 내가 어떻게 볼 방법이 없으니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적어도 볼 때마다 식당이나 바에서 여러 친구들과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보면 안팎으로 매우 즐거운 친구임이 분명해 보인다.
여섯 번째, 이스라엘에서 현대 무용가로 활동하는 미치루는 이번 까미노길이 두 번째이고 첫 번째 혼자 걸은 까미노길 경험이 좋은 경험으로 남아서인지, 이번에는 일본에 사는 친동생도 불러와서 같이 걷고 있다. 좋은 것을 동생과 같이 하는 점은 좋지만 누나가 여기까지 불렀으면 좀 잘 먹일 것이지 아토피까지 있는 동생을 맨날 밥 대신 과자만 먹인다. 레온 전의 마을에서 같이 밥을 먹는 기회가 있었는데, 오랜만에 아주머니 손으로 막 지은 따뜻한 밥과 찌개를 보더니 밥 세 그릇에 누룽지까지 먹는다. 좋은 것은 동생과 같이 해야 하지만 역시 집 떠나면 고생은 확실하다.
일곱 번째 스페인 출신의 마테오는 휴가를 내서 걷는다고 한다. 모름지기 휴가라면 휴양지 같은 곳을 가서 선베드에 누워 파라솔 꼽힌 칵테일을 마시는 그런 것이 휴가가 아니냐고 물으니, 오롯이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갖고 싶어서 까미노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내가 아는 전형적인 관광산업에서 의미하는 ‘쉼’의 개념을 무색하게 만드는 답이다. 앗! 챙피.
마지막으로 오늘 저녁 먹으면서 들은 이야기이다.
첫날 오리손 산장에서 묵을 때 싱가포르에서 온 단체 여행객들과 같이 묵었어요. 그중 존슨이라는 분이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데, 오셨다고… 다음날 걷는데, 제가 걸음을 느리게 걷다 보니 그 존슨을 만나게 되었고 저한테 먼저 가라고 했지만 초파리 체력의 저는 계속 존슨과 같이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게 됐고 본인이 이제 까미노길도 걸었으니 언젠가는 남미의 파타고니아도 가고 싶다고 하면서 저에게 같이 가자고... 당장 내일 일도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는 상황이지만 흔쾌히 내년에 같이 파타고니아를 가기로 약속도 했고요. 다음날 아침 그 싱가포르 여행객 중의 한 한국분을 통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원래 존슨의 가족은 건강상의 이유로 이번 까미노 여행도 절대 못 가게 반대를 했었지만, 결국 고집을 부려서 겨우 오게 되었다... 아마도 이번 여행이 그의 생애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라고요. 그날은 종일 울면서 걸었어요.
어떤 사람들에게는 까미노길이 흔히 유튜브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는 ‘죽기 전에 봐야 할 10대 경치, 죽기 전에 먹어야 할 10가지 음식 등’이 아니라 정말로 ‘죽기 전에 와 봐야 할 곳’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